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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품격] 열혈 문화운동가 ‘동정 박세림’

10기 송암예술아카데미 ‘인천 근현대 예술인의 삶’4편 권상호 동방문화대학원 교수 ‘동정 박세림’ 강의  인천투데이=이형우 기자 l 인천이 배출한 절정의 서예가는 검여만 있는 게 아니다. 인천 문화 발전을 위해, 인천의 혼을 지키기 위해 헌신한 사람. 일필휘지, 글씨를 단숨에 써 내리는 서법으로 알려진 사람. 한국 서예계에서 검여와 어깨를 나란히 한 사람. ‘동정 박세림’ 선생이다.권상호 동방문화대학원 교수가 송암미술관이 주관한 송암예술아카데미 ‘인천 근현대 예술인의 삶’에 출연해 인천 서예의 봉우리 동정 박세림 선생의 삶을 얘기했다. 아래는 강의 내용 일부를 정리한 글이다. ㆍ[인천의품격] 한국 박물관의 길을 연 우현 고유섭ㆍ[인천의품격] 국내 최초 공립박물관 개관 '석남 이경성’ㆍ[인천의품격] 추사 이후 최고의 서예가 ‘검여 유희강’동정 박세림. (사진제공 권상호 서예-도정문자연구소 블로그)“스스로 학문과 서예를 수학하다”동정은 1925년 4월 20일 강화도에서 태어났다. 3대 독자로 태어난 그는 가족들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다. 동정은 6살 때부터 뛰어난 서예가인 할머니에게 천자문과 한글, 동몽선습(조선시대 아동용 교재)를 배웠다. 동정의 부친은 독립운동가다. 그의 부친은은 향토사 ‘강도지’를 저술할 만큼 당대 문호로서 시문에 능했다.동정이 8살이 되던 해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동정은 부친을 따라 한문과 서예 학습을 시작했다. 인천 해성중학교(인천남중학교)에서 현대적인 학문을 접하며 공부했다. 하지만 동정 나이 15살, 매정하게도 부친마저 세상을 작고했다.동정은 이에 굴하지 않고 사숙(私淑, 어떤 사람의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으나 배우고 싶은이의 작품 등을 스스로 익힘)하며 한문과 서예에 정진했다. 당나라 구양순과 안진경의 해서를 주로 연습했다.어린 나이에 이별한 할머니와 아버지의 가르침이 뿌리가 되고 스스로 배우려는 의지가 줄기가 돼 동정의 서예는 피어 올랐다.1947년 동정은 23살에 인천예술인협회 총무부장, 대동서도협회 회장, 대동서도협회 공모전 심사위원 등을 맡았다. 또 문총구국대 인천지무 총부부장을 맡았고 대동서화동연회 사무국장을 7년간 역임했다.동정은 작품 활동도 적극적이였다. 대동서도협회 전람회에 8점, 제1회 대동서화동연회전에 5점, 제2회 전시회에 7점을 출품했다.동정 박세림. (사진제공 권상호 서예-도정문자연구소 블로그) “시암과 검여를 만나며 동정의 서예가 완성되요”동정은 스승 시암 배길기를 만나 큰 변화가 생긴다. 구양순 해서를 위주로 배우며 서예 실력이 빠르게 성장했다. 제2회 국전부터 출품하기 시작해 6회 국전까지 연속으로 입선했다. 7·8회 국전에서 동정은 특선도 이룬다.동정은 서예에 더 집중하기 위해 1954년 서울한의과대학을 중퇴했다.동정은 1958년부터 1960년까지 3년동안 매년 개인전을 개최했다. 그 과정에서 동정은 등석여와 조지겸의 글씨를 익히는 등 자신의 서예 세계를 넓혔다. 특히 검여와 자연스럽게 교류하며 검여의 영향을 받았다. 동정은 검여의 북위풍의 맛을 곁들이면서 동정만의 서체를 완성했다.국전에 8차례 출품한 후 동정은 국전 초대 출품, 대동서예협회전, 대동서화동연회전, 동정서숙전 등으로 성실하게 작가 활동을 펼쳤다.1960년 동정은 제9회 국전에서 문교부 장관상을 수상햤다. 출품작 작풍은 황정견과 구양순의 필의가 가미된 북위서풍 글씨이다. 당시 소전 손재형에게 첨삭지도를 받았다.그밖에도 동정은 인천시 문화상, 경기도 문화상을 수상하고 동정서숙 창설, 인천문총 대표최고위원 역임, 예총 경기지부 부지부장 역임 등 단체 활동도 끊임없이 했다.반야심경(동정, 1973).“조심스럽지만, 과로가 단명의 원인일지도 모를 일이에요”동정은 1965년 예총 경기지부 지부장을 맡으며 많은 심사와 작품 출품으로 바빠진다. 세상에 이름을 떨친 동정은 지부장을 5회 연임하고 대학, 회사, 은행, 방송국 등에 많은 강의 요청을 받았다.같은 해 동정은 서울 종로에 서실을 냈다. 또 인천시사 편찬위원과 경기연감 편찬위원을 역임하면서 제14회 국전 서예분과 심사위원과 제5회 동정서예개인전을 모두 소화했다.동정은 파월장병지원 대책위원, 5.16민족상 이사, 인천시 행정자문위원, 반공연맹 경기지부 운영위원, 인천시 감사장, 민주공화당 중앙위원회 농어촌분과위원 등을 역임하며 정치 행보도 보였다.그밖에 동정서숙을 개칭한 동정한묵회 이사장, 인천문화원장, 국전 서예분과 심사위원장, 강화문화재 고문, 전국문화원연합회 이사, 기서문화 향토사연구회 회장 등을 맡았다.동정은 교육 활동도 힘썼다. 인천교육대학 강사, 인천소년교도소 재소생 서예지도위원, KBS방송국 서예반 지도 강사 등 강의에 나섰고 동정한묵회에서 수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대표적인 제자로 청람 전도진, 송암 정태희를 손꼽는다.동정은 서예 외에도 종교, 문화, 정치, 교육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많은 활동을 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많은 활동을 했던 탓일까. 키 182cm와 몸무게 95kg로 호방하고 건장했던 동정은 1975년 자신의 집 안방에서 돌연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는 51세였다.동정은 해방과 분단, 전쟁 속에서 서예의 맥을 잇고 자신의 제자를 양성했다. 동정 스스로 정리 정돈 하는 깔끔한 성격이 그의 서체에 담겨 있다.이런 동정의 정신을 인천은 품지 못했다. 동정의 제자 청람 전도진이 인천에서 그의 예맥을 계승하고 있지만 인천은 무관심했다. 동정 유족이 동정의 작품과 유품을 인천에 기증하려 했지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동정의 제자가 교편을 잡고 있는 대전대학교에 동정의 작품과 유품을 기증했다.인천에 국립문자박물관과 시립미술관이 들어설 예정이다. 추사의 예맥을 잇고 한국을 대표하는 걸출한 서예가를 배출한 고장은 인천이다. 검여와 동정은 모두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란 대한민국 대표 서예가다. 하지만 두 서예가의 영혼이 찾아와 쉬고, 시민들이 두 사람의 법고창신 정신을 공감할 수 있는 공간이 인천에는 없다.   
2021.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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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품격] 추사 이후 최고의 서예가 ‘검여 유희강’

10기 송암예술아카데미 ‘인천 근현대 예술인의 삶’3편 권상호 동방문화대학원 교수 ‘검여 유희강’ 강의 인천투데이=이형우 기자 l 인천은 역사적으로 문자와 관계가 깊은 도시다. 인천은 세계 최초 금속활자 ‘상정고금예문’과 강화도 선원사에서 두 번째로 만든 대장경인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을 간행·조판한 곳이다. 송암 박두성 선생이 한글점자 ‘훈맹정음’을 창제한 곳이기도 하다.이런 역사 맥락에서 인천은 절정의 서예가를 배출했다. 바로 추사 김정희 이후 최고 서예가로 평가받는 ‘검여 유희강’ 선생이다.권상호 동방문화대학원 교수가 주관한 송암예술아카데미 ‘인천 근현대 예술인의 삶’에 출연해 인천 서예의 봉우리 검여 유희강 선생의 삶을 얘기했다. 아래는 강의 내용 일부를 정리한 글이다. ㆍ[인천의품격] 한국 박물관의 길을 연 우현 고유섭ㆍ[인천의품격] 국내 최초 공립박물관 개관 '석남 이경성'검여 유희강 생가“서예와 회화를 함께 공부하며 자신의 서풍을 다듬다”검여는 1911년 5월 22일 경기도 부평군 서곶면 시천리(현재 인천시 서구 시천동) 57번지에서 태어났다. 검여가 태어난 지 28일이 되던 날, 그의 부친이 작고하는 바람에 검여는 큰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했다.4살 때부터 한문을 익힌 그는 일찍이 서예의 토대를 닦았다. 검여는 1934년 명륜전문학원(성균관대학교)에 입학하고 1938년 중국으로 유학을 가는 등 새로운 학문을 배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검여는 중국에서 8년동안 서화와 금석학, 서양화를 공부했다. 이 시기는 검여만의 특성을 만든 중요한 시기다. 검여만의 북위해서 서체와 회화적인 공간 구성은 이때 연구하며 만들어졌다.검여는 해방 이후 1946년 귀향해 인천에서 본격적으로 예술 활동에 참여했다. 많은 예술단체를 조직하고 중책을 맡았다. 대표적으로 국전 초대 작가와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석남 이경성의 뒤를 이어 2대 인천시립박물관 관장을 7년동안 맡았다.제1회 서도예술전에 생애 첫 서예 작품을 출품했다. 인천문총이 주최한 3회 미술전에는 양화와 서예를 동시에 출품했다. 2회 국전에는 첫 작품으로 ‘념’과 ‘고시’를 출품해 입선했다.1956년 2회 인천시문화상에 유화를 출품해 미술부문문화상을 수상했고, 6회 인천미협전에도 유화작품을 출품했다. 총 유화작품 22점을 출품했다. 검여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검여는 서예에만 몰두했다. 검여는 국전에 초대작가로 등장하며 두각을 나타냈고,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며 후대를 양성했다. 검여는 국전에 모두 초대작가로 12번, 심사위원으로 6번 참여했다. 검여 유희강“추사 김정희 이후 최고의 서예가”검여는 자신의 작품을 국전에 출품하며 서예가로서 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검여는 송나라 황정견과 소동파, 청나라 등완백과 조지겸, 조선 말기 김정희 등 여러 서예가들의 서예를 연구하고 공부했다. 이 과정에서 전서와 예서, 해서와 행서 등 다양한 서체를 실험적으로 학습했다.검여는 서예가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했다. 1956년, 1957년 각각 5, 6회 문교부장관상을 연속으로 수상했다.검여는 1959년 인천 은성다방에서 1회 개인전을 개최했다. 검여의 여러 서체가 담긴 50여 점을 출품했다.검여는 국전 특선, 문교부장관상 연속 수상, 국전 추천작가, 초대 작가 심사위원 등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며 세상에 이름을 떨친다. 특히 2회 개인전에서 소위 검여체라 불리는 ‘북위해서’ 풍의 행서를 보여주기 시작했다.중후하고 질박함을 보여준 절정기를 보여준 검여는 반신불수로 오른손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제1회 검여 유희강 개인전. (사진제공 권상호 서예-도정문자연구소 블로그)“검여, 정신력으로 육신의 고통 극복하다”검여는 1968년 9월 7일 새벽 뇌출혈로 쓰러져 의식불명에 빠진다. 2주 만에 깨어났지만 오른쪽 반신불수와 실어증 증세로 더 이상 서예가로 활동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하지만 검여는 포기하지 않았다. 제자들의 적극 권유로 검여는 왼손으로 서예를 시작했다.한쪽에만 날이 있는 칼은 도, 양쪽에 날이 있는 칼은 검이라 부른다. 유희강의 아호 ‘검여’의 검이 칼 검이다. 아호에 담긴 운명처럼 검여는 양 손을 사용한 서예가로 부활했다.검여는 1969년 4회 한국서예가협회전에 첫 왼손 작품을 출품했다. 1970년 국전 초대작가로 왼손 작품을 출품했다. 1973년 서울화랑에서 상형문자를 위주로 한 4회 개인전을 개최했다. 1975년 5회 개인전인 ‘검여 유희강 좌수전’을 열고 ‘검여 유희강 서예집’을 출간했다.이색 '홍시자가' 검여의 좌수서.검여의 강인한 정신력도 하늘의 뜻을 이길 순 없었다. 1976년 10월 16일 절친한 화가 배렴의 사망 소식을 듣고 제문을 쓰다가 17일 새벽 고혈압에 의한 뇌출혈증이 재발했다. 의식불명에 빠진 검여는 한마디 유언도 없이 18일 운명했다.검여의 사후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이 전시회 등을 열며 검여를 기렸다. 2006년 서거 30주년이 되는 해 검여의 뜻을 잇는 후학들이 모여 ‘시계연서회’를 만들었다. 시계연서회는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에서 시계서회전을 개최해 그를 기렸다.같은 해 인천문화재단이 ‘인천 문화예술 대표인물 조명사업’ 인물로 검여를 선정하고, 검여 서거 30주년 기념 특별전을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에서 개최했다.검여의 유족들(유환규, 유소영, 유신규 등)은 2019년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에서 검여 유희강 특별전시회를 열었다. 또한 작품 400점과 습작 600점, 생전에 사용했던 벼루, 붓 등을 조건 없이 기증했다.검여의 작품을 검여의 출생지인 인천이 수장고가 없어 한 점도 품지 못한 게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다. 검여의 생가가 있던 서구 시천동 아라뱃길 매화동산에엔 검여 선생의 생가만이 봄 햇살을 맞이하고 있을뿐이다. 
2021.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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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논단 - 예술작품은 무엇을 먹고 사는가 2021. 2월호

2021. 2월호
2021.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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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노동과 휴식

2021. 1월호
2021.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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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 소수민족 축제 사로잡았다” - 서북미문화재단의 화려한 춤 ‘압권’(기사 찾기)

http://munhwai.com/news/view.html?skey=%BF%F6%BD%CC%C5%CF%C1%D6&page=37§ion=237&category=244&no=1858도정 권상호가 빚어낸  서예 ‘신비’장희숙 무용단원들의 북 연주 ‘감명 한국문화가 타코마 최대의 축제인 ‘제25회 소수민족 축제’를 사로잡았다. 지난 30일 타코마 다운타운 라이트 공원에서 개최된 축제에는 84개국 소수민족들이 참여, 어머니 나라의 춤과 음악, 음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부스가 마련됐다.  서북미문화재단(단장 안경숙) 단원들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인 무대 위에 오른 38개 팀 가운데 가장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화려한 의상으로 차려입은 단원들은 주로 국악으로 연주된 복음 성가에 맞춰  부채춤과 화관무 등을  선사, 관람객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아 사회자가 안경숙 단장을 무대로 다시 초대해 인터뷰와 함께  앵콜 무대를 요청하기도 했다.  2년 전에 이어 이번 소수 민족 축제 참가를 위해 한국에서 온 도정 권상호 씨는 흰 한복 사하의에 흰 모자까지 눌러 쓴 채  수십 미터에 달하는 종이 위에 대나무와 영문 한글 등을 거침없이 써내려갔다. 축제 마당에 구경 나온 어린이에서 어른에 이르기까지 수십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권 씨의 그림과  글씨  쓰는 모습에 신비로운 눈길을 보내는 등 단연 인기였다. 수백 명의 시민들은 권 씨가 서북미문화재단의 춤으로 시작한 ‘팀 코리아’ 소개에 이어 춤사위가  벌어지자  여러 명의 한인들과 함께 영문과 한글로  ‘코리아 웨이브. 축 제25회 소수민족 축제’및 그림과 글이 곁들인 수십 미터에 달하는 종이를 들고 퍼포먼스를 펼치자 환호성과 함께 큰 박수갈채를 보냈다. 장희숙 단장이 이끄는 북춤과 장구춤 역시 시민들로부터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받았다.  시민들은 장 단장의 숨돌릴 틈없는 대북 연주에 이 단원들이 연주하는 북 연주에 담긴 한국의 소리에 심취, 큰 감명을 느끼는 표정이 역력했다.  워싱턴주 대한부인회(회장 영숙 고링)의 음식 부스에서는 성정하상한인성당 교우들이 나와 불고기와 잡채, 만두 등을 판매했다. ‘코리아의 맛’을 음미하기 위해 미국인들은 식품 위생국에서 음식 판매 허락이 시작되기  전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도정 권상호 서예 및 서화가는 “2년 전에 왔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나의 퍼포먼스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며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림과 글을  통해서 한국의 문화를 간단하게나마 선보이고 맛을 보였다는 것에 만족한다” 고 했다.  김정태 munhwausa@gmail.com    
2020.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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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오늘의 오감으로

오직 오늘의 오감으로도정 권상호입술을 동그랗게 하고 /오/라고 발음해 보세요. ‘오늘도 OK!’. 모두 옳았어요! All right!표현의 주체인 나도 ‘吾(오)’로 발음합니다. 과거와 미래의 중간에 ‘오늘’이 있고, 우리는 죽을 때까지 ‘오늘’만 살다가 갑니다. 하루의 중간은 ‘午時(오시)’, 숫자 1~10의 중간도 ‘5’입니다. 河圖(하도)와 洛書(낙서)의 중간 숫자도 ‘五’이죠. ‘吾’를 중심으로 八方(팔방)과 八字(팔자)가 둘러싸고 있고, 숫자 ‘5’를 중심으로 여덟 개의 숫자가 음양으로 갈마들며 둘러싸고 있습니다. 팔도강산이나 팔방미인도 여기에서 나오지요. 悟得(오득)하셨나요?한글 ‘오’자는 대지 한가운데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ㅗ’는 대지 위에 솟아나는 새싹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도전하는 사람, 또는 움트는 창작 의욕의 이미지로 다가오지 않습니까?서예창작은 일반적으로 3단계의 과정을 거칩니다. ‘무엇을 쓸 것인가’ 하는 選文(선문) 과정, ‘어떤 서체로 쓸 것인가’ 하는 選體(선체) 과정, ‘어떻게 구도를 잡을 것인가’ 하는 章法(장법) 과정 등이 그것입니다. 먹빛, 붓맛, 자형, 구도 등 귀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가장 소중한 것은 아무래도 내용(contents)일 것입니다. 내용은 ‘選文(선문)’과 관련이 있고, 최고의 선문은 ‘作文(작문)’입니다. 글씨 좀 못쓰면 어때요? 고슴도치도 제 새끼가 제일 곱다고 하듯이 잘못 지어도 ‘자기 글(吾文)’, 잘못 써도 ‘자기 글씨(吾書)’가 최고지요.서예에서 九宮紙(구궁지) 중심에는 항상 표현의 주체인 ‘吾’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자에는 표현을 뜻하는 口(입 구)가 들어있지요. 그럼 무엇을 표현해야 할까요?첫째, 남의 얘기는 말고, ‘나의 이야기를 쓰자’는 것입니다. 붓을 내 몸이라 생각하고 나의 정체성(identity)을 찾아 ‘오직 吾人의, 오로지 오늘의 오감을’ 표현해 보자는 것이죠. ‘오감’은 ‘五感(오감)’이기도 하고 ‘吾感(오감)’이기도 합니다.나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는 ‘생각의 근육’이 필요합니다. 육신의 근육에서는 힘이 나오지만, 생각의 근육에서는 창작(creation)이 나옵니다. 좀 부족하더라도 나의 생각, 나의 느낌, 나의 상상을 글로 쓸 때, 생동감이 넘칩니다.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글을 한글세대가 보고 좋아할 리 없습니다. 물론 ‘읽는 서예’가 ‘보는 서예’로 바뀌었다고 강변할 수는 있지만요.둘째, ‘오늘의 이야기를 쓰자’는 것입니다. 백년 후의 사람들이 컴퓨터 시대를 살아간 나를 보고 ‘저 사람 조선시대 사람 아니야?’ 라고 비웃을 일을 생각하니 쪽팔리지요.책을 읽거나 영상물을 보다가 ‘이것이다’ 하고 메모해 두기도 하고, 경전이나 시집에서 내용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이는 결국 완전한 내 것이 아니라 남의 생각이죠. 엄밀히 말하자면 지적재산권 침해에 해당합니다. 백운 이규보는 이를 두고, 서툰 도둑이 옛사람의 뜻을 몰래 훔쳐 가는 拙盜易擒體(졸도이금체)라 했답니다.옷을 만들려면 옷감이 필요하고, 요리를 하려면 식자재가 필요하듯이 글을 쓰려면 글감이 필요합니다. 붓을 잡게 하는 동인(motive)은 항상 글감에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동기유발이 중요하듯이, 서예도 ‘붓 꼴림’을 불러일으키는 글감이 있어야 걸작이 탄생할 수 있습니다. 최고의 글감은 시대성과 현장성을 지닌 글감입니다. 이러한 싱싱한 글감으로 요리한 작품이라야 비로소 창조성과 역사성을 지닐 수 있다고 봅니다.예술가는 시대의 대변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코로나19 시대입니다.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면서 코로나를 배제한 글은 죽은 글이나 다름없습니다. 격리 상태에서 ‘나의 이야기’ ‘오늘의 이야기’를 자기 방식대로 창작하여, 소셜 미디어(social media)로 공유하며 즐길 때, 진정한 시대성이 있는 이 시대의 서예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글씨를 쓰는 과정은 잠시도 멈출 수 없는 무용이나 음악과 같은 긴박한 시간예술이지만, 그 끝은 언제나 그림이나 조각과 같은 공간예술로서 영원한 결과물로 남는다는 데에 서예의 매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부족하나마 오늘도 붓을 잡는 까닭입니다. ​
2020.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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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한국서예가협회전

2020. 8. 25~ 9. 1 서울, 인사아트프라자 갤러리2020. 9. 15 ~ 9. 20 대전, 대전예술가의집
2020.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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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경서예축전

대구경북서예축전- 세계문화유산 등재 기념 2020. 9. 8 ~ 9. 12 (경북도청 동락관)2020. 9. 15 ~20 (대구문화예술회관)
2020.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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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서예 아이콘: 학예병진전 - 강암서예학술재단

學藝竝進展- 剛菴書藝學術財團(강암서예학술재단)2020. 9. 10(목) ~ 9. 16(수) 인사동 백악미술관2020. 9. 18.(금) ~ 9. 24(목) 전북예술회관 
2020.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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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도 극복할 9월 서예 아이콘 : 학예병진전 - 강암서예학술재단

學藝竝進展- 剛菴書藝學術財團(강암서예학술재단)2020. 9. 10(목) ~ 9. 16(수) 인사동 백악미술관2020. 9. 18.(금) ~ 9. 24(목) 전북예술회관
2020.09.06

종이 위의 오케스트라 - 붓 지휘자 환빛 이병도(李炳道) -

  종이 위의 오케스트라 - 붓 지휘자 환빛 이병도(李炳道) - 권상호(문학박사, 문예평론가)1. 서예는 시대의 초상(肖像)이다.오늘은 미래의 과거이다. 오늘의 일들은 미래의 역사가 된다. 오늘 마무리한 글씨는 미래에는 역사 속의 서예사, 문학사가 된다.“오늘의 내 글씨를 두고 백 년 뒤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혹여 그때까지 내 작품이 남아 있기라도 할까?”붓을 잡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작업을 마친 뒤에 늘 마음속으로 떠올려보는 질문이다. 먹의 가장 큰 가치는 영원성에 있다. 그래서 먹 자국을 남긴다는 것은 그만큼 조심스럽고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이 사람, 죽도록 임서(臨書)만 하다가 갔구먼.”“뭐야, 자기 생각을 쓴 글은 하나도 없네? 협서(夾書) 머리의 ‘錄(녹)’자만 봐도 남의 글뿐이야.”“도대체 10세기 사람이야, 20세기 사람이야? 그 붓에, 그 먹에, 그 서체라니. 다양한 폰트(font)를 살피지도 않았나?”“알고 보니 21세기를 살다간 사람인데, 당시의 시대상이 보이지 않네.”“그 시대에는 펜도 물감도 다양했다는데, 왜 그런 필적은 없을까?”서예는 시대의 반영이자 초상이다.전통적으로 서예가는 시대상의 대변인으로서 당시의 문화를 붓끝으로 잘 담아내 왔다. 갑골(甲骨文)이나 석고문(石鼓文)에는 선진(先秦) 시대의 삶의 모습이 오롯이 새겨져 있고, 王羲之(왕희지)의 난정서(蘭亭序)에는 353년 저장(浙江)성 샤오싱(紹興) 난정(蘭亭)에서의 곡수유상(曲水流觴) 문화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顏眞卿(안진경)이 ​758년에 쓴 제질문고(祭姪文稿)에는 안록산의 난으로 피살된 조카 안계명(顔季明)에 대한 슬픔이 묻어나고, 김정희(金正喜)가 제자처럼 아끼던 역관(譯官) 이상적(李尙迪)에게 그려준 세한도(歲寒圖)에는 1844년 유배지 제주도에서의 김정희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백년 뒤의 후손들이 나의 작품을 보고 어떠한 느낌을 받을까 하고 추측해보면 정신이 번쩍 든다.세상은 오프라인 접촉시대(接觸時代)에서 온라인 접속시대(接續時代)로 바뀌었다. 손에 필기구를 들고 쓰는 시대에서 키보드나 키패드를 손가락으로 터치하는 시대로 바뀌었다. 그 결과 서예 가치의 두 축 중에서 실용성(實用性)은 사라지고 예술성(藝術性)만 남아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중요한 것은 서예라는 장르의 특성상 글의 회화적 형식만큼이나 글의 내용, 곧 콘텐츠도 중요하다. 아무리 전통서예(傳統書藝)의 종말을 얘기하고, 신서예(新書藝)가 태동했다 하더라도 서예를 서예이게 하는 기저에는, 글의 내용이 서체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의미가 포함된다. 물론 그 내용에는 위에 든 예에서처럼 시대정신이나 시대담론이 반영되어 있어야 함은 당연하다.그런데 당대 상당수의 서예가는 아직도 전통을 지켜야 글씨랍시고 글의 내용보다 고전 서체만 따라 쓰기에 급급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따라서 가장 잘 따라 쓴 글씨가 큰 상을 받곤 하는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곤 한다. 실력 있는 서예가란 고전이나 스승의 문자 형식의 틀에 갇힌 글 감옥의 수감자가 되어 버린 꼴이 된다. 그 결과 아쉽게도 오늘날의 서예인은 지금까지 지켜왔던 문화의 첨병(尖兵)이라는 자리를 고스란히 남에게 빼앗기고, 인습(因襲)에 묶여있는 처지가 되었다.이런 현실에서 서예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은 당연히 멀어지고, 마침내 글씨로 먹고살기 어려운 세상이 되어버렸다. 문제는 난관에 처해 있으면서도 그 난관의 원인을 잘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더 큰 문제가 있다.이런 때에 다행스럽게도 서예의 현실적 문제점을 짚어보고, 시대정신을 잘 읽어나가는 작가를 만났으니, 바로 환빛 도반(道伴)이다. 환빛은 일찍이 트레이닝 과정인 임서(臨書) 선수 생활을,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3도를 오가며 여조삭비(如鳥數飛)하듯 마치고, 이제 창원의 창공을 비상하기 위해 ‘변화(變化)’와 ‘창조(創造)’라는 두 날개를 펼쳤다.그는 지금까지 여섯 번의 전시를 통하여 이미 붓길의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탄탄한 한글서예 위에 한자서예 능력까지 체득하여, 한글작품을 중심으로 한문작품을 곁들이기도 한다. 특별히 국한문(國漢文) 혼용의 가능성을 점치며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다. 그리고 도자기에 글씨를 입혀 생활서예에 접근하기도 하고, 아예 서화동원(書畫同源)이란 기치를 걸고 그림으로서의 서예라 할 수 있는 회화서예(繪畫書藝)를 펼치기도 했다.이번 일곱 번째의 전시는 지나온 여섯 번의 변화에 이어 또 다른 변화의 세계를 드론처럼 비상하며 새로운 탐색에 나서고 있다. 이번 전시의 가장 큰 변화라면 자신만의 새로운 조형어법을 통하여, 조심스럽지만 환빛체를 보여주기 위해 진중한 모색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사람의 육체만큼 정신도 중요하다. 이는 필체만큼 내용도 중요하다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환빛의 서예가 역사에 남으려면 앞으로는 글감을 정할 때, ‘나의 이야기’ ‘오늘날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좀 더 고심해야 한다고 본다. 서예는 시대의 초상이므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서예가는 21세기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내용을 쓸 때 역사성을 지닐 수 있다.2. 국한문 혼서를 통한 조화미한글 창제 이후 언문일치(言文一致) 이전의 많은 언해류 기록에서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문체를 국어학에서 국한문혼용체(國漢文混用體)라 한다. 서예학에서는 용어의 혼선을 피하기 위해 한글과 한자를 섞어서 쓴 서체를 국한문혼서체(國漢文混書體)라 한다. 여기서는 줄여서 혼서(混書)라 부르기로 한다.그의 전시 작품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 보면, 한글, 한문, 혼서 등이다. 환빛은 한글에 대한 초심과 애정을 잃지 않는 작가이지만 한문 서예의 놀라운 조형어법의 매력에 푹 빠져있다. 하지만 그가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분야가 혼서(混書)이고, 또 이번 전시에서도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한국 서예계는 크게 보면 한글 작가와 한문 작가로 나뉘어져 있고, 혼서 작가는 없는 셈이다. 선조들이 남겨놓은 언해류와 시조, 가사 등은 대부분 혼서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혼서로 쓰인 고전문학 원본을 서예작품화 하는 과정에서 한자 발음만 현대발음으로 고쳐 써서 실수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만약 고전 문장에서 당시의 한자의 표기법을 모른다면 당연히 국한문 혼서로 써야 의미전달의 수월성은 물론 잘못을 피할 수 있다.전시 작품 중 ‘초심(初心)’ ‘님의 침묵(沈默)’ ‘월영대(月影臺)’ ‘서보(書譜) 구’ 등이 대표적인 혼서 작품이다. 더러는 ‘정중동(靜中動)’처럼 협서(夾書)를 혼서로 쓴 경우도 있고, 한글 전문 속에 ‘덕(德)’ 자 한 자만 한자로 끼워 넣은 경우도 보인다.이번 전시 작품 중에서 특히 돋보이는 작품은 ‘초심(初心)’이다. 이 작품에 방점을 찍는 까닭은 남의 글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 속에는 토민 선생 개인전에 다천 선생과 함께 구경하고 돌아온 스토리텔링이 들어있다. 그리고 세상이 다 아는 작가에 대한 조심스런 비평과 함께, 자신의 롤 모델이 평보(平步) 선생임을 밝히고 있다. 후대에 이 작품을 보더라도, 여기에는 작가의 창작 의지와 창작 방향에 대한 진솔한 생각이 담겨있고, 또 학서(學書)의 방향을 밝히는 등, 그 역사성이 다분히 배어 있다고 볼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이다.‘좋은 생각은 가슴에 넉넉한 밭을 가는 길이요, 좋은 행동은 세상에 아름다운 씨를 뿌리는 일이다.’ 이 경구는 아마 작가가 지은 글로 보이는데, 역시 바람직한 경향이다.많은 서예가에게 회자되는 ‘님의 침묵(沈默)’은 혼서의 가능성 및 여러 서체의 조화를 통하여 새로운 조형어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리고 ‘서보 구’는 서보처럼 화려한 초서풍의 혼서로 딱딱한 서론임에도 불구하고 음악처럼 들려온다.순 한글 작품 ‘ᄠᅳ디 이루어시ᄂᆞᆯ’은 파필이 주는 기백과 질긴 획 맛, 장법에 있어 변화 속에 통일을 추구한 점이 돋보인다.그리고 ‘즐기는 사람’의 경우, 분위기로 봐서는 자유분방한 가운데 질서가 있는 자연미가 주는 노장풍(老莊風)의 글씨인데, 주제어와 본문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쓴다면 더욱 가독성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 잘 아는 내용이지만 출전이 임을 밝혀 주는 게 좋다고 본다. 유지나의 노랫말로 보이는 ‘가다보면’의 경우도, 병풍 이미지의 장법 변화가 살갑게 다가오지만 비교적 알려진 내용이라도 본인이 지은 내용이 아니면 작사자를 밝히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한다. ‘기쁨’은 주제어의 지나친 부각으로 좋은 내용의 본문이 주제어에 눌리는 감이 있다.3. 필체는 서예학습의 이력서시대마다의 서체(書體)에는 시대상이 나타나고, 개인의 생체 리듬이 들어있는 필체(筆體)에는 서예 학습의 이력이 나타난다. 그리고 서사 내용을 통해서는 작가의 사고와 철학을 엿볼 수 있다.환빛의 작품 전반에 어리는 서예학습 이력을 보면 그는 아무래도 한글 편에 선다. 그는 한글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깊이 깨닫고 한글 고유의 예술성을 찾아 꾸준히 연구해 온 작가임에 틀림없다. 한글에 나타난 그의 근육을 더듬어 보면 그의 심미적 촉수는 일탈(逸脫)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있다. 사실, 한글 획처럼 양보하고 배려하는 질서는 아름답다. 그리고 그 질서를 위해서는 일정한 규제가 있는데, 서예에서는 이 아름다운 구속을 서법(書法)이라 한다. 서법은 규제가 아니라 붓길의 새로운 질서를 위한 교통신호등이라 할 수 있다.기실 환빛이 지금까지 발표해 온 작품을 살펴보면 서예사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서체를 익힌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전반적으로 무거우면서도 밝게 다가오는 그만의 필체 비밀은 아마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서체에서 온 듯하다. 그가 쓴 한글 진흘림과 한문 초서까지도 광비(廣碑)가 주는 획맛이 배어 있다. 광비는 투박한 듯 순수하고, 무거운 듯 어둡지 않으며, 반듯한 듯 비정형의 고예(古隷) 풍의 미감이 스며있다.환빛 서예의 획질(劃質)은 곡획과 직획의 조화, 전(轉)과 절(折)의 조화를 이루어 황홀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곡(曲)만 있으면 직(直)이 직답지 못하고, 직만 있으면 곡이 곡답지 못하다.달리 말하자면 환빛은 클래식으로서의 규범 서법을 해체하고, 상황 속의 즉흥적(卽興的) 붓 연주를 통한 재즈서예를 선보이고 있다.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오랜 붓 연주를 통한 붓과의 친숙성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랜 학서(學書)와 수련(修鍊)의 결과이겠지만 타고난 감각과 재능이 요구된다. 이 모든 것이 갖추어질 때, 비로소 다양한 붓 연주는 물론 그때그때 다가오는 화선지와의 갈등을 붓질 애드리브(ad lib)로 해소할 수 있다.4. 역설의 미학과 해학적 조형어법만해 시 ‘님의 침묵(沈默)’이란 작품에서 보면, ‘침묵’이라는 주제와는 정반대로 필획(筆劃)에서는 고함치는 소리가 들린다. 이것은 침묵이 가장 큰 소리라는 역설적 표현이다. 국한문 혼서에다 훈민정음 언해본체와 해례본체는 물론 궁체 흘림까지 섞어 씀으로써 오케스트라 연주를 듣는 듯한 살가운 작품이다.작품 ‘정중동(靜中動)’에도 역설적 표현이 내재하고 있다. 내용의 기조는 ‘정(靜)’이지만 작가는 역동적인 전절(轉折) 필법을 통하여 ‘동(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 단순한 먹빛을 지양하고 오색(五色)을 가미함으로써 일반적인 서예 작품에 반기를 들고 있다.환빛의 조형어법은 해학적(諧謔的)이고도 발칙하기 그지없다. ‘花(화)’ ‘通(통)’ 등의 일자서(一字書)와 ‘革新(혁신)’ ‘變化(변화)’ 등의 이자서(二字書)가 특히 그렇다. 여기에서는 글자마다 의(義)에 따라 형(形)을 추구한 점이 보이고, 특히 한 글자 안에서도 서로 다른 서체의 변주(變奏)가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회화로 치면 크로키에 가깝고 여흥으로 치면 마술(魔術)을 부르는 듯하다. 筆力(필력)이 자법(字法)을 덮고 있음도 재미있게 다가온다.5. 문화 트렌드를 잘 읽어내는 작가현실 인식이 없는 작가의 작품은 아무리 낙서(樂書)하더라고 낙서(落書)에 지나지 않는다. 작가는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문화 트렌드를 잘 읽으며 창작할 때, 존재 이유가 있다.환빛의 작가 이력을 살펴보면, 열정은 강도가 아니라 초심의 지속성(持續性)이라 생각된다. 이제는 삶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소소한 일상에서 공감(共感)과 감동(感動)을 주는 ‘나의 글감’을 찾기 바란다. 환빛의 붓질을 통한 여운이 지구촌의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우리는 산업화, 민주화를 거쳐 소위 밀레니얼 세대로 살고 있다. 단군 이래 가장 스펙 쌓기에 골똘하면서도 자기 정체성을 찾지 못한 불안한 세대로 살고 있다. 서예를 공부하는 사람들도 그 많은 공모전을 통하여 엄청난 스펙을 쌓아왔지만 사회로부터 반듯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금전상의 궁핍을 자락(自樂)이라는 반어(反語)로 포장하며 살아왔다.이런 상황에서 전통 서예 장르를 거부하고 새로 나타난 장르가 ‘캘리그라피(calligraphy)’이다. 캘리그라피는 전통서예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디자인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전통 서예의 불통(不通)에서 오는 고통(苦痛)은 사라졌지만, 서예 형식의 커다란 요소라 할 수 있는 붓맛과는 거리가 멀다. 다행히 환빛은 전통서예의 바탕 위에 붓맛이 살아있는 캘리의 옷도 잘 입고 나타난 작가이다. 한국 캘리그라피 창작협회라는 새로운 무대에서 그를 만난 것이 필자와의 인연이 되었다.적어도 환빛은 전통서법의 무대 위에서 참신한 캘리 패션의 옷을 걸치고 붓 연주를 하는 사람이다. 수많은 글자들이 그의 붓끝에서 소리를 낸다. 그는 종이 위의 오케스트라 연주자이다.
2020.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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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평 전투(蘆原坪 戰鬪) 대첩비

노원평 전투 대첩비의 비문을 쓰게 된 인연으로 수락산 입구에 새로 건립된노원평 전투 대첩비를 찾았다...이에 앞서 사명대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임주혁 선생의 도정문자연구소 방문이 있었다.원래 2020년 6월 25일 10시 30분에 제막식을 거행할 예정이었으나코로나19로 인하여 연기되었다.​호국존자 표지​노원평 전투(蘆原坪 戰鬪) The Battle of Nowompyeong노원평 전투는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년) 3월 25일부터 27일까지 사흘 동안 군량 확보를 위해 마들평야 일원(노원평)으로 진출한 수많은 왜군을 공격하여 크게 승리한 전투이다., , 등의 사료에 의하면, 노원평 전투로 마무리되는 한성 탈환 작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사명대사 유정惟政이 이끄는 의승병과 경기방어사 고언백 군사, 황해 및 3도 방어사 이시언 군사 등이었다. 조선군은 3월 25일 왜군이 양주 방면으로 나올 것으로 미리 알아 노원평, 누원樓院(도봉동), 우관동牛串洞(우이동) 등에 군사를 숨겨놓고, 3월 26일에 왜군들이 나타나자 좌우에서 공격을 가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어서 3월 27일 또다시 많은 왜군이 나타나 수락산 일대를 약탈하자, 고언백의 군사와 사명대사 유정의 의승병들이 높은 곳에서 화살로 공격하니 왜군은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에는 왜군에 포로로 잡혀 있다가 탈출한 군사의 증언을 인용하여 사흘간의 노원평 전투에서 왜군이 입은 피해는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산성 전투보다 적지 않다고 평가하였다.노원평전투는 전과戰果뿐만 아니라 그 후의 전투상황이나 동아시아 국제질서 형성에 미친 영향등을 고려하면 역사적 의미가 임진왜란의 어느 전투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노원평전투대첩비 건립추진위원회 노원문화재단이사장 : 김승국 노원문화원장 : 박춘택 노원향토사연구소장 : 박경룡 광운대학교 중앙도서관장 : 이향철 사명당기념사업회 회장 : 김관호 휘호 서예가 : 권상호 시공업체 : 민 조형연구소 - 조각 민문기 참여작가 : 조각가 김구환, 한국화가 김종호 석재 : 미진art 이기현 청동 : 태양미술 최순규 2020 6월 10일 건립 (2018년 서울특별시 주민참여 예산으로 건립) ​
2020.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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