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쪽 작업까지 옮김

 

(東文選)

 

신라 때부터 조선 숙종 때까지의 시문(詩文)을 모은 책. 154권 45책. 서거정(徐居正) 등의 편저. 고활자본(古活字本)과 목판본이 있다. 내용은 목록 3권, 정편(正篇) 130권, 속편(續編) 21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정편은 1478년(성종 9)에 성종이 서거정 등에게 명하여 편찬한 것이고, 속편은 1518년(중종 13)에 신용개(申用漑)․김전(金詮) 등이 편찬한 것을 1713년(숙종 39)에 대제학(大提學) 송상기(宋相琦) 등이 개편한 것이다. 정편은 신라 때부터 조선 전기까지의 시문을 모은 것이고, 속편은 그 이후부터 숙종 때까지의 시문을 수집 정리한 것이다. 1914년에는 고서간행회(古書刊行會)에서 출판하였으나 속편이 누락되어 있다. 민족문화추진위원회에서 68~70년 12책으로 번역, 발간하였다.

 

(徐居正/1420~1488)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 달성(達城). 자 강중(剛中). 호 사가정(四佳亭). 시호 문충(文忠). 1444년(세종 26) 식년문과에 급제, 사제감직장(司宰監直長)을 지냈다. 51년(문종 1) 사가독서(賜暇讀書) 후 집현전박사(集賢殿博士) 등을 거쳐 56년(세조 2)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57년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 공조참의 등을 역임했다. 60년 이조참의 때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헌에 올랐으며, 64년 조선시대 최초로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었다. 66년 다시 발영시(拔英試)에 장원한 후 6조(曹)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70년(성종 1)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고 달성군(達城君)에 책봉되었다. 45년간 여섯 왕을 섬겼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편찬에 참여했으며, 또 왕명을 받고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국역(國譯)했다. 성리학(性理學)을 비롯, 천문․지리․의약 등에 정통했다. 문집에 《사가집(四佳集)》 저서에 《동인시화(東人詩話)》 《동문선(東文選)》 《역대연표(歷代年表)》 《태평한화(太平閑話)》 《필원잡기(筆苑雜記)》 《골계전(滑稽傳)》이 있으며 글씨에는 《화산군권근신도비(花山君權近神道碑)》(忠州)가 있다. 대구(大邱) 귀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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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동아대백과사전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문선

영물시

사군자

한국문화상징사전

 

 

(東文選)

신라 때부터 조선 숙종 때까지의 시문(詩文)을 모은 책. 154권 45책.

서거정(徐居正) 등의 편저.

고활자본(古活字本)과 목판본이 있다.

내용은 목록 3권, 정편(正篇) 130권, 속편(續編) 21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정편은 1478년(성종 9)에 성종이 서거정 등에게 명하여 편찬한 것이고, 속편은 1518년(중종 13)에 신용개(申用漑)․김전(金詮) 등이 편찬한 것을 1713년(숙종 39)에 대제학(大提學) 송상기(宋相琦) 등이 개편한 것이다.

정편은 신라 때부터 조선 전기까지의 시문을 모은 것이고, 속편은 그 이후부터 숙종 때까지의 시문을 수집 정리한 것이다.

1914년에는 고서간행회(古書刊行會)에서 출판하였으나 속편이 누락되어 있다.

민족문화추진위원회에서 68~70년 12책으로 번역, 발간하였다.

 

(徐居正/1420~1488)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 달성(達城). 자 강중(剛中). 호 사가정(四佳亭). 시호 문충(文忠).

1444년(세종 26) 식년문과에 급제, 사제감직장(司宰監直長)을 지냈다.

51년(문종 1) 사가독서(賜暇讀書) 후 집현전박사(集賢殿博士) 등을 거쳐

56년(세조 2)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57년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 공조참의 등을 역임했다.

60년 이조참의 때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헌에 올랐으며,

64년 조선시대 최초로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었다.

66년 다시 발영시(拔英試)에 장원한 후 6조(曹)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70년(성종 1)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고 달성군(達城君)에 책봉되었다.

45년간 여섯 왕을 섬겼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편찬에 참여했으며, 또 왕명을 받고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국역(國譯)했다.

성리학(性理學)을 비롯, 천문․지리․의약 등에 정통했다. 문집에 《사가집(四佳集)》 저서에 《동인시화(東人詩話)》 《동문선(東文選)》 《역대연표(歷代年表)》 《태평한화(太平閑話)》 《필원잡기(筆苑雜記)》 《골계전(滑稽傳)》이 있으며 글씨에는 《화산군권근신도비(花山君權近神道碑)》(忠州)가 있다. 대구(大邱) 귀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四君子)

동양화의 화제(畵題).

세한삼우(歲寒三友:松竹梅) 중의 매화와 대나무에 국화와 난초를 더한 것으로 명나라 때 진계유(陳繼儒)가 《매란국죽사보(梅蘭菊竹四譜)》에서 매란국죽을 사군자라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

사군자화는 삼우도(三友圖)와 같이 세상의 오탁(汚濁)에 물들지 않고 고절을 지킨 문인․고사(高士)․화가 들의 화제로 애호의 대상이었다.

묵매도(墨梅圖)는 북송(北宋)의 미불(米芾)이 시작하였다 하나 확실하지 않고, 화광중인(華光仲仁)․양보지(楊補之)가 유명했으며, 묵죽도는 명대(明代)에 와서 일반화한 것으로 계예(計禮)․황익(黃翊) 등이 유명했다.

한국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성행, 조선에 계승되어 사대부의 유교 교양의 일부로 널리 퍼졌고 남종화파(南宗畵派) 중 문인화가들이 즐겨 그렸다. 어몽룡(魚夢龍)은 묵매도로, 이정(李霆)은 묵죽도로 이름을 떨쳤다.

 

(文人畵)

전문적인 화가가 아닌 시인․학자 등 사대부층 사람들이 여기(餘技)로 그린 그림.

중국 명말(明末)의 대표적 문인인 동기창(董其昌)이 그의 《화지(畵旨)》에서 제시한 중국 문인화가의 계보에서는 당(唐)나라 때의 시인이며 그림에도 능했던 왕유(王維)를 첫손에 꼽는다.

그후 동원(董源)․거연(巨然)․이성(李成)․범관(范寬)․이공린(李公麟)․왕선(王詵)․미불(米芾)․미우인(米友仁) 등을 열거하고, 다시 원말(元末)의 대가로 황공망(黃公望)․왕몽(王蒙)․예찬(倪瓚)․오진(吳鎭)과 명나라의 문징명(文徵明)․심주(沈周) 등을 들고 있다.

문인화는 처음에 특정한 양식을 갖지 않았으나 ‘원말 4대가’의 출현으로 산수화양식의 전형이 완성되었다. 이를 남종화(南宗畵) 또는 남화(南畵)라고 하며, 비로소 문인화 특유의 양식이 정착하였다.

한국의 경우, 조선 전기 강희안(姜希顔) 등의 문기(文氣) 넘치는 문인화가가 있었으나 남종화가 본격적으로 수용되고 유행하였던 17세기 이후부터 강세황(姜世晃)․이인상(李麟祥) 등의 남종문인화가 나왔고, 조선 후기에는 김정희(金正喜) 같은 대가가 나오기도 하였다.

 

(詠物近體詩)

조선 후기의 위항시인 유재건(劉在健)이 근체시 가운데 영물시(詠物詩)만을 제재별로 분류한 선시집.

고금영물근체시(古今詠物近體詩)라고도 한다. 필사본. 32권 11책. 규장각도서.

근체시는 당대(唐代)에 와서 확립된 5․7언 율절(律絶)을 가리키므로 당대 이후부터 청대(淸代)까지의 중국시와 신라․고려 때부터 당시에 이르는 한국 시작품이 망라․수록되어 있다.

수록된 시의 숫자는 당나라 316수, 송(宋)나라 103수, 금(金)나라 50수, 원(元)나라 126수, 명(明)나라 356수, 청나라 540수, 신라 4수, 고려 83수, 조선 613수 등 2,191명이며 작품은 7,588수이다.

이 책은 시대와 신분․국적을 초월하여 모든 시인의 시를 똑같이 취급하는 편집방식을 취하였고, 각권마다 새와 꽃과 달, 강과 산, 생활 주변에 있는 모든 사물을 제재로 한 다양한 시집이다.

 

세계일보

梅蘭菊竹 즉 사군자는 우리 옛선비의 學問과 思想, 心性을 표현한 象徵體로 교양의 하나이면서 독자적인 회화영역이었다.

사군자는 16세기 무렵부터 부흥하기 시작했지만 그전에도 墨竹, 墨梅, 墨蘭, 墨菊으로 불리었다.

그림의 상징성 이외에도 먹과 붓이라는 최소의 매재로 최대의 표현을 추구하는 매력이 있으며 특히 서예의 필획을 그대로 응용, 형상화할 수 있다는 친근감 때문에 선비들 사이에 크게 유행했다.

미술사학자 洪善杓씨(홍익대박물관 연구원)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사군자는 고려시대에 시작되었으며 ‘詩書畵 一律論’으로 정착해 金富軾은 墨竹을, 鄭知常은 墨梅를 즐겨 그렸다.

조선 초기에는 王에서부터 畵員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사군자를 즐겨 그렸는데 당시 각종 文集에도 ‘題畵詩文’이 가장 많이 보이고 圖畵署 畵員의 시험 1등 과목에 채택될 정도였다.

 

중앙일보

四君子는 梅․蘭․菊․竹을 고결한 군자에 비유, 예부터 선비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교양으로서 독자적인 회화 영역을 이뤄왔다.

고려중기인 12세기쯤 宋나라로부터 전파돼 조선조에 이르러 사대부의 心意를 드러내는 매체로 크게 꽃을 피웠다.

日帝時代에도 鮮展에 사군자 분야를 따로 두는등 명맥을 이어왔으나 30년대 이후 서예의 한 분야로 점차 쇠퇴해 왔다.

 

조경희

선비의 氣槪를 담은 우리의 그림

 

서론

오늘날 과다한 서구문물의 범람에 따라 ‘우리 文化의 본질은 무엇인가?’란 문제가 심심찮게 거론된다. 우리 文化 자체에 대한 개념의 상실과 외래문화에 대한 무분별한 수용으로 인하여 과연 우리가 지니고 있고 또 보여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문화예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만의 고민만은 아니다.

그에 따라 지금의 복잡한 사회 구조 속에서 우리 선인들이 남긴 문화 유산을 새롭게 조명하고 그 가치의 중요성을 재인식하려는 노력은 매우 뜻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梅蘭菊竹 즉 사군자는 우리 옛선비의 學問과 思想, 心性을 표현한 象徵體로 교양의 하나이면서 독자적인 회화영역이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각종 공모전을 비롯하여 여러 서화가들이 사군자를 즐겨 치고, 그 위에 畵題를 반드시 써 넣는다.

문제는 우리 전통 예술 양식의 하나이자 현대에도 많은 묵객들에게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사군자가 오늘날은 화제에 대한 소양의 부족으로 외형만 모사되고, 깊이 있는 사상의 표출을 기대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畵題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리하여 신라때부터 조선 숙종 때까지의 우리 시문학을 집대성한 에 나타난 사군자시를 통하여 사군자 각각에 나타난 象徵性을 파악하여, 선비 정신을 고양하고, 묵객에게는 알고 치는 사군자화가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본 논고를 쓰게 되었다.

 

梅花

어원

‘梅花’는 한자 ‘梅’와 ‘花’의 합성어로서, 사군자의 하나이다. ‘梅’의 古字로서 ‘某, 槑’ 등이 있다. 특히 ‘某’자는 梅實이 시고 달기 때문에 ‘甘’자와 ‘木’자를 합성한 것이다.

梅 ‘枏(녹나무 남)也. 可食. 從木 每聲.’ 매화는 가지와 잎이 번성하므로 每(草盛上出)聲을 붙였다.

 

무속․민속

[회춘] 매화는 만물이 추위에 떨고 있을 때, 봄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 주는, 삶의 의욕과 희망을 되찾아 주는 눈 속의 꽃이다. 겨울의 매화는 죽은 용의 형상인데, 여기에서 꽃이 피어남은 늙은 몸에서 정력이 되살아나는 回春을 상징한다. 매화를 집 안에서 가꾸는 것만으로도 春情을 북돋우며, 그 열매로 담근 술은 강장 효과가 있다.

[사랑] 매화는 사랑을 상징하는 백 가지 꽃 중에서 으뜸이다. 모란이 부귀, 연꽃이 군자, 난초가 은군자와 귀녀, 국화가 은일자, 해당화가 신선인 데 비해, 매화는 꽃 중의 우두머리라고 ‘白眉故事’에서 설명하고 있다. 매화는 여성의 비녀 그림에 가장 많이 등장하고, 민화의 花鳥圖에도 즐겨 그려진다. 모두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상징이다.

 

풍습

[절개] 양가의 여인들은 대나무의 절개 상징성에 대하여 매잠 대신 梅竹簪을 사용하였다. 조선 세조 때의 성삼문은 호를 梅竹軒이라고 하였다. 단종에 대한 연군의 뜻을 눈 속에 피는 매화로 표상하고, 대나무의 절개의 뜻을 더하여 충신의 의지를 상징한 것이다.

[덧없음] 매화도 한 철, 국화도 한 철이라는 속담이 있다. 매화가 아무리 사람들의 애호를 받는 좋은 꽃이라 하더라도, 그 생명성은 한 철에 그치므로 결국 사라지고 만다는 뜻이다.

[약, 술] 매화의 열매는 한방에서 약으로 쓰인다. 약성은 溫하고 酸하며, 收斂, 止瀉, 生津, 鎭咳, 驅蟲 등의 효능이 있기 때문이다. 매실을 소주에 담가 매실주를 만들어 먹기도 하며, 꽃잎을 넣어 죽도 쑨다.

[똥] 宮中에서 똥을 매화라고 하였고, 임금의 대변기를 매화틀이라고 하였다. 왕의 신성성을 높이고자 한 데서 생겨난 상징이다.

 

종교

[유고: 선비의 기품, 절조] 매화는 추위를 이기고 꽃을 피운다 하여 불의에 굴하지 않는 선비 정신의 표상으로 많이 재배하였다. 鄭道傳은 ‘梅川賦’에서 당시의 선비 河有宗의 고결한 인품을 매화로 상징해 읊었다. 다음의 시조도 고결한 기품의 선비를 상징하고 있다. 매화의 향내는 선비의 고결한 덕의 발현을 상징한다.

 

매화 피었다기에 산중에 들어가니,

봄눈 깊었는데, 萬壑이 한 빛이라.

어디서 꽃다운 향내는 골골에서 나나니.

 

도연명의 정원엔 소나무, 국화, 그리고 대나무뿐

梅兄은 어찌하여 여기에 들지 못했나.

내 이제 매형까지도 아울러서 風霜契를 만드니,

절개와 맑은 향기 흠뻑 알겠네.

 

천연한 玉色은 세속의 어두움 뛰어 넘고,

고고한 기질은 뭇 꽃의 소란스러움에 끼여들지를 않아.

 

[불교: 불교의 전래] 우리 나라에서는 불교에서 독자적으로 상징적 의미가 형성된 바는 없다. 일반적인 것은 아니나, 一然은 다음의 시에서 신라에 불교가 전파된 것을 매화로 상징하여 표현했다.

金橋엔 눈이 덮여 얼어붙음 풀리지 않아

鷄林엔 봄빛이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는데,

기특하기도 해라, 봄의 신 꾀도 많아서

毛禮의 집 매화에다 먼저 손을 썼네.

 

동양 문화

[중국: 봄소식] 매화나무는 잎사귀가 나기 전에 꽃이 먼저 핀다. 매화나무는 추위가 한창인 중국 북방에서 유일하게 온실 보온 없이 꽃이 피는 나무이며, 새해에 가장 먼저 꽃이 피는 나무이다. 그러므로 꽃이 필 무렵에 음력으로 새해가 시작된다.

[겨울, 미인] 매화를 ‘氷肌玉骨’이라 하여 천진하고 순결한 처녀에 비유하였다. 따라서, 매화는 겨울과 여인을 상징한다.

달 구석 매화 몇 가지

추운 겨울 혼자 피네.

멀리 보아 눈은 아니니,

은은한 향기 스스로 풍기네.

[행운의 신] 매와의 다섯 잎사귀는 다섯의 상서로운 신을 상징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운수를 예측하는 데 사용하였는데, 이는 철학자 邵雍에 의해 발전되었다.

[시녀, 성희] 매화는 몸종이나 시녀 이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성적인 의미가 내포되어있다. 기생집 침상 도구에는 매화 그림이 많으며, 二度梅는 재혼을 말한다. 또, 楊梅病은 梅毒으로, 몸에 매화 같은 반점이 보인 데에 유래한다.

[친구, 다산] 매화는 소나무, 대와 함께 ‘겨울의 세 친구’로 불린다. ‘靑梅竹馬’라 하면, 한 쌍의 연인이 어릴 때부터 의좋게 지낸 관계를 가리킨다. 또, 매화나무는 많은 씨를 퍼뜨린다 하여 다산을 상징한다.

[호색 요녀] ‘龍城錄’에 이ㅡ하면 隋나라 趙師雄이 羅浮山을 구경하다가 해가 지고 추워서 민가를 찾았다. 솔밭 사이로 불빛이 보여 내려갔다. 그런데 소복 단장한 미인이 마중을 나오며 맞이하였다. 잔설이 얼어붙은 위로 달빛이 희미하게 비쳤다. 여인의 말씨는 몹시 청아하고, 향기로운 냄새는 방 안에 가득하였다. 술을 즐기는데, 홀연히 한 綠衣 童子가 나와 춤과 노래로 취흥을 돋우었다. 취해 쓰러져 잤는데, 추위를 느껴 깨어보니 큰 매화나무 아래에 누워 있었다.

여기서 미녀는 매화나무의 정령으로, 호색 요녀를 상징한다.

[일본: 영력] 곧게 자란 매화의 어린 가지에는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靈力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새로 집을 지어 이사하거나 제사 지낼 때, 매화 지팡이로 집안을 두드려 악귀를 쫓는다. 또, 악마가 붙어 아픈 소는 매화 막대기로 치면 악마가 떨어져 병이 낫는다고 믿었다.

[신성] 의식 때에 매화 지팡이를 사용하는 수가 있고, 사원에서 修法하는 사람들도 매화 지팡이를 사용한다. 또, 귀인이 땅에 꽂은 매화 지팡이에서 뿌리가 내려 큰 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많이 있다. 이들 모두는 매화 지팡이에 특별한 종교적 의의가 있고 神性함을 표상한다.

[양기의 전령사] 겨울은 力學的 사고로는 죽음의 상태에 있는 계절이다. 이 계절의 끝머리에 핏기 시작하는 매화는 만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천지의 양기의 회복을 알리는 전령사, 또는 우주 생기의 최초의 발현을 상징한다.

 

천지 간에 陰氣가 꽉 차 있어

어느 곳에서 봄빛을 찾는담.

기특하기도 해라, 저토록 수척한 것이

얼음, 서리 물리쳐 내네.

 

坤陰이 힘을 부리는 것 막기 어려워,

만물이 뿌리로 돌아가 쉬이 찾아지질 않네.

어젯밤 남쪽 가지에 흰 송이 하나 생겨났기에,

향 사르며 단정히 앉아 天心을 보네.

 

[순결한 미녀] 시에서 옥, 선녀, 달 등의 이미지와 관련해 표현된 데서 알 수 있듯이, 매화는 미녀 중에서 순결의 감각을 주는 미녀를 상징한다. ‘天香國艶’은 원래 모란을 상징하였으나, 조선 시대 이황에 이르러서는 매화를 가리키게 되었다. 모란과 매화는 대조적인 꽃이다. 그런데 도학적 美意識은 盛粧한 미녀의 이미지인 모란 대신에 淡粧한 미녀의 이미지인 매화를 최고의 미녀로 상징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옥 같은 살결엔 아직 맑은 향기 있네(이규보, 매화), 곱고도 아리따운 玉仙의 자태여(김구용, 매화 그림), 더불어 같은 것이 없는 천향국염이로다(이황, 지인 우연히)’ 등의 표현이 그것이다.

[선비 정신] 매화는 사군자의 필두로서 고결한 선비 정신을 상징한다. 시조에 나타난 최초의 매화는 이색의 작품이다.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흘러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골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

 

매화는 落木寒天에 홀로 서 있는 傲霜孤節의 국화와 더불어 선비들에게 오랜 사랑을 받아 왔다. 그것의 속성이 아담한 운치와 높은 절조에 있기 때문이다. 조선 말 안민영은 ‘詠梅歌’ 8수로 梅花贊의 대미를 장식했다. 여기에 1수를 본다.

 

어리고 성긴 가지 너를 믿지 않았더니,

눈 기약 능히 지켜 두세 송이 피었구나.

燭 잡고 가까이 사랑할 때, 暗香조차 浮動터라.

 

송나라 임포의 시 ‘暗香浮動月黃昏’에서 따온 제6구는 人口에 오래 회자되어 왔다. 안민영은, 서호에 은거하며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아들로 삼았다는 고사를 염두에 두고 시를 썼을 것이다.

[조국 광복의 염원] 근대 시에 보이는 매화로는 이육사의 ‘광야’가 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일제 강점기에, 이육사는 매화 향기를 환각하면서 조국 광복의 꿈을 싹틔웠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지사로서, 문사로서 높은 정신적 경지를 보여 준 작품이다.

[선구자] 김진섭은 ‘매화찬’에서 매화의 교훈적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즉, 매화는 초지상적, 초현세적인 인상을 주는 꽃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超高하고 절개가 굳은 꽃이며, 한때를 앞서는 선구자의 영혼에 피어나는 꽃이라고 하였다.

 

현대․서양

[생식력] 북아메리카 인디언 중에는 야생의 매화를 생식력의 상징으로 삼는 부족이 있다. 야생 매화는 번식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꿈에 그 열매가 나타나면 에로틱한 의미를 띠며, 성적 쾌락의 욕망을 보여 주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도상

[군자] 매화는 고려 이래로 우리 미술에서 다양하게 다루어진 소재이다. 고려 때에는 歲寒三友 또는 四君子라 일컬어지는 梅, 蘭, 菊, 竹이 묵화로 즐겨 그려졌다. 이에 따라, 고려 도자기에서도 그러한 소재가 의장 무늬로 많이 쓰여졌다. 이러한 花卉는 繪畫에서 그 고결함으로써 君子를 상징한다. 우리 나라는 일찍이 풍속이 아름답고 예절이 발달한 나라라 하여 君子國으로 불렀다. 조선 시대 회화와 도자기, 나전 칠기 등 각종 공예 미술에도 의장 요소로 많이 쓰여졌다.

[겨울날의 세 벗] 고려 회회로서 현재 일본에 있는, 海崖의 ‘세한삼우도’ 등이 있다. 北宋의 영향을 받아 墨竹과 墨梅 등이 유행했다.

[선비의 아취] 고려 상감 청자로서 매화, 대나무, 소나무가 그려진 梅甁 등이 있다. 조선 시대에는 청화 백자 매조문 항아리[靑華白磁梅鳥紋壺] 등에서 매화가 즐겨 施紋되었다. 이러한 매화는 선비의 아취를 상징한다.

 

참고 문헌

일연, 삼국유사

김천택, 靑丘永言

안민영․박효관, 歌曲源流

이육사, 陸史詩集, 서울출판사, 1946.

柳宗元, 龍城錄

日本大百科全書, 小學館, 1985.

 

蘭草

어원

난초는 본디 한자어 ‘蘭(난초 란)’과 ‘草(풀 초)’의 합성어로서, 우리 고유어는 없다. ‘蘭’자가 ‘艸(풀 초)’와 ‘闌(나간 란: 성부)’이 합쳐져 된 형성 문자인 것을 보면, 문자가 형성되기 전부터 ‘난’이라는 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甲骨文이나 鐘鼎文에는 ‘蘭’자가 없고, 漢代의 ‘說文解字’에서 비로소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 ‘蘭’이라는 말이 우리 나라에서 사용된 것도 중국 한나라 이후 시기로 추정된다.

신화

[변신, 재생] 지리산의 산신인 聖母神 摩耶姑(마야고) 신화가 구전되고 있다.

마야고는 사랑하는 반야를 기다리면서 나무 껍질에서 실을 뽑아 베를 짰다. 그리고 그 베로 옷을 만들어 천왕봉에서 기다렸다. 구름에 휩싸인 반야는 마야고의 앞을 스쳐 쇠별꽃밭으로 갔다. 쫓아가 잡으려고 했으나 잡지 못해, 화가 난 마야고는 만들어 둔 옷을 갈가리 찢어서 버렸다. 그것들은 여기저기 나뭇가지에 걸려 나부꼈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은 마야고는 반야를 현혹시킨 쇠별꽃을 지리산에서는 피지 못하게 하고, 천왕봉 꼭대기에서 성모신으로 좌정하였다. 그 후, 마야고가 찢어서 버린 옷의 실오라기들은 風蘭이 되어 지리산에 서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천왕봉 정상에는 성모신의 석상이 있다.

[여름] 신화 체계에서 난초는 여름의 신인 火星을 상징하며, 번창과 향락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난초를 정성껏 기르거나 그린다는 것은, 풍요의 계절이 여름이듯이 農産의 신을 받드는 행위로 볼 수 있다.

풍습

[귀녀] 사군자 중에서 대가 남성적이라면, 난초는 여성적이며, 특히 명문의 貴女에 비유된다. 그것은 왕비의 궁정을 蘭殿, 미인의 침실을 蘭房이라 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蘭’자를 파자해 보면 ‘艸(풀 초)+門(문 문)+柬(고를 간)’이니, 香草 중에서 고른 명문의 귀녀라는 의미가 된다. 난초 기르듯이, 不淨한 것을 멀리하며 원만하고 청순하게 딸을 기르면 귀녀가 나온다 한다.

[벽사] 난초를 기르면 집안에 상서롭지 못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막아 주고, 잎을 달여 먹으면 해독이 되며, 오래도록 마시면 몸이 가뿌해지고 노화 현상이 없어진다고 중국의 ‘본초경’에 기록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 나라에도 전해져, 난초 그림을 집 안에 걸어 두고 辟邪를 염원하였다.

특히 난초를 그리는 법은, 붓끝이 처음에 거꾸로 들어가 못머리를 만들다가, 가볍게 뽑아 약간 누르면서 사마귀 배통[螳螂腹]을 만들고, 붓을 들면서 옆으로 돌려 쥐꼬리처럼 길게 뽑는다.

사마귀는 해충을 잡아 먹는 곤충으로, 지네, 거미 등과 같이 辟邪 동물로 상징된다. 또, 쥐는 十二支神의 첫째로서 음양을 한 몸에 구비한 多産의 대표적 동물이며, 가문의 번창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난초잎을 그리는 마음 속에는 邪惡을 쫓고 貴人이 거듭 나게 하는 뜻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손 번창] 난초는 자손의 번창과 관련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경기도 지방에서는 “난초꽃이 번창하면 그 집에 식구가 는다.”는 말이 있고, 충북 지방에서는 “꿈에 난초가 대 위에 나면 자손이 번창하고, 난초꽃이 피면 미인을 낳는다.”는 말이 전한다. 또, 난초와 관련된 속담으로 “난초에 불 붙으니, 蕙草가 탄식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동류의 괴로움과 슬픔을 함께 한다는 뜻이다.

종교

[군자, 선인] 유교의 가르침 중에 ‘孔子家語’에서 “芝草와 난초는 숲 속에서 자라나, 사람이 찾아오지 왆는다고 향기를 풍기지 않는 일이 없고, 君子는 덕을 닦고 도를 세우는 데 있어서 곤궁함을 이유로 절개나 지조를 바꾸는 일이 없다.”, “착한 사람[善人]과 함께 살면, 지초와 난초가 있는 방에 들어간 것처럼 오랫동안 그 향기를 알지 못한다.”고 하여, 지초와 난초를 군자와 대응시키고 있다. 易經에도 “마음이 착하여 나와 서로 잘 맞는 사람의 말은 그 냄새(말의 맛)가 난초와 같다.”라고 한 것은 난초를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으로 인식한 바탕에 근거한 말이다.

동양 문화

[아름다움, 상서] 난초는 중국에서 그 문화와 정신적 가치가 부여되어 우리 나라와 일본 등으로 전파되었기 때문에, 난초에 대한 문화 상징적 관념은 세 나라가 거의 공통적이다. 세 나라에서 난초가 향기로운 식물로 사랑을 받으면서 아름다운 것의 한 표본으로 같이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淮南子’에는, 남성이 난초를 심으면 외양이 아름답게 자라기는 하지만 향기를 풍기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 까닭은 남성과 난초가 서로 정이 통하는 사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난초를 여성만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楚辭’의 離騷에는 “가을 난초를 꿰어 패물로 찬다.”라고 하였다. 이 때의 가을 난초는 君子와 같은 인격체의 상징으로 쓰였다.

그밖에, 꿈에 난초를 보면 아들을 낳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춘추 시대 정나라 임금 목공의 어머니가 난초를 꿈꾼 후에 목공을 낳았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도 정몽주의 어머니가 난초를 꿈꾸고 나서 정몽주를 낳았다고 전한다.

역사․문학

[그윽한 향기]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수로왕이 아유타국의 공주 許黃玉과 그 일행을 맞이할 때, 난초로 만든 마실 것과 蕙草로 만든 술로 대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고려 말의 문신 李齊賢은 ‘櫟翁稗說’에서 “일찍이 餘杭에 객으로 머물러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난을 분에 심어서 선물하였다. 이것을 서안에 놓아 둔 후, 손님을 접대하고 일을 처리하느라고 그 향기를 몰랐는데, 밤은 깊어 고요해 달은 휘영청 밝고, 난향이 코를 찌르는 듯하니, 맑고 그윽한 향기를 말로써 표현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난초는 우리 나라에도 오래 전부터 자생하여 시인 묵객의 사랑을 받았고, 문학 작품에서는 은군자 등 여러 가지의 상징성을 나타내고 있다.

[은자]

 

난초의 특성

국화의 특성

대나무의 특성

 

 

1. 사군자의 의미와 기원

사군자는 매화․난초․국화․대나무의 네 가지 식물을 총칭하는 개념이다. 많은 꽃과 식물 중에서 특별히 이들을 선택하여 덕과 학식이 높은 사람의 인품에 비유, 君子라 하였다. 그 까닭은 매화․난초․국화․대나무가 뛰어난 아름다움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라, 각이 높은 기상과 품격을 지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梅花는 이른 봄 눈이 채 녹기도 전에 추위를 무릅쓰고 제일 먼저 꽃을 피우며, 蘭草는 깊은 산중에서 은은한 향기를 멀리까지 퍼뜨린다. 菊花는 늦가을에 첫 추위와 서리를 이겨내며 꽃을 피우고, 대나무는 모든 식물이 잎을 떨어뜨린 추운 겨울에도 푸르고 싱싱한 잎을 간직하고 있다. 매․난․국․죽의 순서는 각각이 꽃피우는 봄․여름․가을․겨울의 순서에 따른 것이다.

이와 같이 사군자는 모든 식물이 두려워하는 추위를 이겨 찬바람과 눈보라 속에서 꽃을 피우고 푸르름을 더하는 매화, 국화, 대나무와 깊은 산중에 홀로 피어 고고히 향기를 뿜어내는 난의 기상을 취한 것이다.

특히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지조와 절개를 군자의 가장 큰 덕목으로 여겼던 유교 사회에서는 고난과 악조건 속에서도 꿋꿋이 꽃을 피우는 사군자가 선비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 왔다. 즉 사군자를 통하여 변함없는 뜻과 마음을 나타내고자 하였으며, 고아하고 탈속한 경지를 추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사군자의 발생과 전개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사군자’는 중국의 회화에서 성립된 畵目이다. 사군자라는 총칭으로 일컬어지기 이전부터 매화․난초․국화․대나무는 詩文과 그림에서 각각의 기상을 취해 즐겨 다루어졌다. 지금은 일반적으로 文人墨畵의 소재로 알려져 있으나, 중국에서는 그림의 소재가 되기 훨씬 앞선 시기에 시문의 소재로 등장하였다.

최초로 대나무가 에 나타난 것을 비롯하여 그림의 소재로도 제일 먼저 기록되고 있으며, 대나무와 함께 매․난․국은 花鳥畵의 일부로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北宋(960-1126) 때에 와서 여러 가지 故事나 시문을 통해 이들 네 식물이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되어, 차츰 문인화의 소재로 발달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상징성에서뿐만 아니라 서예의 기법을 그대로 적용시켜 그릴 수 있다는 점에서 士大夫 화가들에게 매력적인 畵目으로 등장하였다.

南宋(1127-1279) 말기부터 元代(1279-1368) 초기에는 몽고족의 지배하에서 나라를 잃고 은둔 생활을 하는 漢族 문인들 사이에, 지조와 절개를 지키며 충성심과 불굴의 정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크게 유행되어 그 의미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鄭思肖의 난초로, 흙이 없는 난초 포기만을 그려 몽고족에게 국토를 빼앗긴 설움을 표현하였다.

그 뒤 明代(1368-1644)에 들어와서 이들 매․난․국 ․죽 특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