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산문에서 시로 방향을 틀었다. '지구의 가을' '제국호텔'을 쓴 시인 이문재(46)씨에게 대본을 맡긴 것이다.

실제 공연에서 전문가들이 어떤 평가를 내릴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선택에 만족해 하고 있다.

이씨는 "언어 예술 중에서 시가 가장 압축적이고 생략도 빈번하다.

무용이나 발레도 설명이 없다는 점에서 시와 닮은 꼴"이라는 입장이다.

장씨는 "발레의 장면 구성에 시의 이미지가 도움이 된다.

그래서 대본도 아예 시로 써달라고 부탁했다"고 밝혔다.

처음에 이씨는 평소에 관심 있던 조선 후기의 화가

최북의 일생을 형상화한 시 열 편을 장씨에게 건넸다.

하지만 좀 더 대중적인 소재를 찾자는 장씨의 '강경한' 입장에 부딪혀

대여섯 차례 퇴고한 끝에 여러 장르의 예술에 동시에 적용되는 수묵으로 소재를 바꿨다.

수묵은 서예가일 수도, 화가일 수도, 그리고 더 넓게 보면 무용수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씨의 시편들은 '수묵' 구석구석을 구성하는 장면으로 바뀌었다.

공연 앞부분 화가 역을 맡은 남자 무용수가

붓 역할을 하는 여자 무용수의 몸체를 들어올려

화선지에 획을 긋는 장면을 연출한 게 대표적이다.

구체적으로는 발레 전체를 상징하는 시 '붓의 노래'에서

장면 구성의 실마리를 얻었다.

이씨는 여자 무용수의 신체를 붓으로,

머리채를 붓털로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도 제시했다고 한다.

장씨는 "스토리라인을 따라가지 않고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산문보다는 시가 무용 작업에 더 어울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수묵' 관객에게는 이씨의 시 원고가 주어진다.

관객이 상상력을 발휘해 시와 발레를 감상하도록 하자는 취지다.

 

1만~5만원. 1588-7890.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붓의 노래
-발레 '수묵'을 위한 크로키

붓은 기다린다
잘 마른 붓은 말라서 곧추 서 있다
종이는 기다린다
잘 마른 종이는 스스로를 비워 놓고 있다
먹은 기다린다
먹은 온 몸이 새카매져서 꼼짝 않는다

먹이 젖는다
마음이 흔쾌이 젖어 있는 것이다
이윽고 붓이 젖는다
마음이 이미 길을 찾은 것이다
종이가 빠르게 젖는다
선뜻 마음이 길에서 내려서는 것이다
(후략)

시와 발레가 만난다.

그래서 농담(濃淡)과 번짐,

여백의 미학을 추구하는 수묵(水墨)을 형상화한다.

무용가 장선희(45)씨가 21일부터 23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무대에 올리는

창작 발레 '수묵' 이야기다.

장씨는 그동안 여러 차례 문학의 도움을 받아 발레 작품을 만들어왔다.

1996년에는 이문열씨로부터 대본을 받아 '황진이'를 만들었고,

2000년에는 이인화씨의 무용 대본으로 단군을 다룬 창작 발레 '신시'를 만든 바 있다.

현대 무용의 취약 부분으로 지적되곤 하는 작품의 극적 구성을

이야기의 힘을 빌려 탄탄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앙일보에서

게재일 : 2005년 01월 19일  [29면]   기고자 : 신준봉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