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회관준공기념비
수동회관 준공기념비 예천군 지보면 수월리 수동(首洞)에 동민들의 오랜 소망이었던 쉼터이자 여가선용의 공간인 마을회관이 세워졌다.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인 진영산 자락에 봉황의 벼슬에 해당하는 문필봉을 바라보고 있는 평화로운 마을 수동은, 내성천과 수월천을 각각 해자처럼 두르고 있다. 조선 명종 때 태사공 권행(權幸)의 22세손 훈련판관 권영통(權永通)께서 천혜의 길지임을 예견하고 개척하신 마을인데, 인조 때 권태일(權台一) 선조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태일촌(台一村)이라 부르다가, 다시 구한 말 용궁군수께서 이 마을을 둘러보고 환경이 수려하고 동네가 아름다워 과연 ‘맨 먼저 찾아볼 만한 고을’이라 하여 ‘머릿골’로 부르다가 나중에 ‘수동(首洞)’으로 개칭했다. 우리 삶의 어려운 역사적 현실에도 굴하지 않고 일에는 성실과 단합으로 학문에는 예지와 끈기로써 마을을 일궈 나가 많은 명사들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의 산업화와 도시화의 큰 소용돌이 속에 출향인이 많이 생기고, 고향은 공동화되기에 이르렀다. 정보와 문화의 21세기를 맞아 육신의 태반이자 정신의 안식처인 내 고향 수동을 살리자는 목소리와 함께 경향 각지의 애향심의 결실로 마을회관의 준공을 보게 되었다. 이제 화합과 나눔의 보금자리를 중심으로 동민과 출향인 모두가 일취월장할 것을 기원하며, 이 감동을 후손에게 길이 전하고자 이 비를 세운다. (수월리란 행정 명칭처럼 이 복된 마을에는 수수한 사람들이 수월하게 태어나서 수월하게 살아가다가 죽기도 수월하게 하리라. 수동이란 동명처럼 지혜가 뛰어난 인재가 끊임없이 배출되어 나라와 인류의 기둥이 될 것이다.) 2006년 9월 일 수동 주민 일동 * 마지막 ( ) 안 부분은 삭제하자는 의견들이 많아 생략한다.--------------------------------------------(참고) 새 희망찬 수동인들에게 친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계절의 여왕이란 5월이 우리의 마음을 한결 부풀게 하고 있습니다."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네."란 옛글이 생각케 합니다. 큰 희망과 포부를 안고 정들었던 땅을 멀리하고 삶을 개척하신 분들과 이미 세상을 멀리 하신 위 우르신 분들, 그 흔적만이 4백년의 역사를 가진 이곳 수동마을의 주위를 맴도는 것 같습니다. 시대가 주는 문화의 혜택을 부분만 접하면서 흙만을 낙으로 알고 살아가는 저희에게 한 가지 뜻이 있어 이 글을 띄웁니다.~ 대지 110평에 25여평 규모의 아늑한 마을회관 건립에 뜻을 모았습니다. 마침 정부 지원금 3, 4천만원에 힘을 빌어, 마을기금 일부, 대지구입을 맡으신 분, 즉석 성금 기 백을 선뜻 내신 현지 외지 분들이 있었기에 추진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예산에는 좀 못 미치는 감이 있고 건립 이후 유지비등을 감안할 때 뜻 있는 여러분들의 손길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현실에 있어 내가 또는 나의 후손이 머무를 수 있는 집이라 생각하시고 힘들고 어려우시겠지만 정성어린 성의에 적극 동참하여 주셨으면 하여 올리옵니다. 또한 그 뜻을 영원히 보존코자 앞면 비석 글과 더불어 뒷면에 성함과 찬조금을 올려 놓고자 합니다. 타 마을의 경우에 의하면 적은 액수를 모두 기록하려면 면 부족을 10만원 이상으로 하였다 하니 야속한 감이 듭니다만 저희들도 그렇게 하겠으니 양해 바라겠습니다. 준공식날은 수십년간 보고 싶었던 얼굴, 그때를 놓지면 평생 후회할 그런 모임의 한 자리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우리는 '수동사랑 모임'이란 이름으로 명실공히 마음에 드는 회관을 만들어 놓겠습니다. 여러분의 가내에 가족들 건강하시고 늘 웃음꽃이 피어나는 다복한 나날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래 ---------가. 사업명 : 마을 회관(노인정) 건립나. 성금마감 : 2006년 6월 10일까지다. 입금계좌 : ~ 권춘배 / 현금접수 : 권정조(수월리 수동)라. 상세문의 : 권상조(017-260-2511)수동 마을 회관 건립 추진위원장 권상호
2006.08.21
제7일 - 7월 21일(금): 산 넘고 물 건너(티베트 네팔 기행문)
* 위: 티베트 마을 축제에 참여하여 기념촬영 * 아래: 소나기를 만나 위험한 물도랑을 건너는 랜드 크루저
제7일 - 7월 21일(금): 산 넘고 물 건너
자, 라싸를 떠나 힌두교의 나라 네팔로 가자. 예약해 놓은 4500cc 랜드 크루저가 일찍이 호텔 앞에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산증으로 두통, 복통, 호흡기 질환 등을 생각하면 네팔로 가는 길이 반갑게 느껴졌다. 결과론적이지만 3박4일을 계획하고 달렸는데, 2박3일만에 1140km를 달려 카드만두까지 온 것이다. 하루에 그 험한 길을 400km 정도 달린 것이다. 둘째 날은 거의 아스팔트 공사 중인 길을 달려왔던 것 같다.
오늘은 네팔행 그 첫날이다. 靑藏철도와 함께 달리는 나무초호수 가는 길과도 이별했다. 공항 구길을 따라 가다가 긴 다리를 건너자 우리는 우회전 쪽을 택했다. 이 반대쪽으로 가면 공항 가는 길이라 했다. 제법 눈에 익은 강을 지난다. 지구상의 모든 恨을 강물줄기로 풀어내듯 강물은 규정지을 수 없는 잿빛 색깔로 유유히 그 먼 바라를 향해 흐르고 있었다. 강 언덕의 제법 큰 나무들과 얕은 강물 위에 인공 조림한 나무들에게 수인사를 하고 라싸를 떠난다. 길가 초지에 양 떼들이 몰려온다. 사진 촬영을 위해 차를 잠시 멈췄다. 열댓 쯤 되어 보이는 몰이꾼 소년이 양 떼들 뒤에서 보란 듯이 채찍을 높이 들어 허공을 치면서 멋들어지게 ‘짝짝’ 소리를 낸다. 반대편에서는 마침 스무 명 안팎의 초등학생들이 여름방학을 맞아 즐거운 표정으로 신나게 떠들어대며 길가에 한 줄로 돌아오는 모습이 보인다. 옷은 빨래를 하지 않아 꾀죄죄하지만 표정만은 하늘빛만큼이나 밝다.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강과 산과 구름, 이 모든 것을 말없이 지켜주는 하늘이 있다. 티베트의 구름은 높이 오르다가 지친 나머지 산과 어울려 지낸다. 산 위에는 구름이 놀고, 산자락에는 양떼들이 논다. 절묘한 조화이다.
마침 한 마을을 지나던 중 지붕 위에서 축제 행사를 갖는 모습을 목격했다. 시골 마을의 행사를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먼저 구경을 할 수 있는지, 또 사진을 찍을 수 있는지 물어 보니, 젊은 청년 두세 명이 큰 나팔을 불면서 환영해 주었다. 우리 일행은 어렵사리 사다리를 타고 마을 한 가운데에 있는 한 지붕에 올라갔다. 수십 명의 남녀 마을 사람들은 한결같이 전통 의상을 입고 있었다. 붉은 가사를 걸친 스물 안팎의 비교적 어린 승려 네 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악기를 연주하면서 염불을 계속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본 즉 계절적인 축제라고 했다. 나중에 달력을 확인해 보니 마침 初伏인데, 이곳에서도 삼복 의례가 있는지 모르겠다. 여고생쯤 보이는 아가씨가 주소를 적어 주며 사진을 보내주면 좋겠다고 했다.
마을을 지나자 본격적인 산행 길이었다. 이다지 숨 막히는 어려운 산길을 자전거 하이킹으로 도전하는 백인도 눈에 띄었다. 눈앞에 잡힐 듯이 보이는 之자형 산길이지만 차는 끊임없이 가속 페달을 밟아야 했다. 마침내 정상에 오르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것은 호수와 초원과 마을이 잘 어울려진 그림 같은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이 대자연에 묘한 그림자를 드리워 그때마다 산하가 달리 보이는 대형 파노라마를 연출하였다.
그렇다. 산이 아름다운 것은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호수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뒤를 돌아보니 불교 경전을 인쇄한 깃발, 이른바 오색 찡판(經幡)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한 젊은이는 끈질기게 찡판을 팔려고 따라왔다. 사려는 기색을 보이면 어디까지라도 따라온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다시 올라갔던 구비를 따라 내려와 기다란 강다리를 건넜다. 라싸와 반대편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오늘 기사 옆자리에 앉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대자연은 마음껏 즐기며 달렸다. 그러나 여전히 엄습해 오는 고소증에는 어쩔 도리가 없다. 인위적으로 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물을 조금씩 마시곤 했다. 소문으로 듣던 다이아목스를 처방 받아 가져 올 걸……. 힘들어 하는 나에게 기사가 작은 氧(양)이라는 상표의 작은 산소통을 내게 건네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마음껏 들이키고 싶지만 조금씩 아껴 마셨다.
고개 넘어 달리다가 들판에서 보리를 추수하는 마을사람들을 만났다. 일반적으로 가을보리를 봄에 거둬들이므로 봄의 또 다른 이름으로 ‘麥秋(맥추)’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여름에 거둬들이니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들판에 음식을 나르는 일은 역시 아낙네의 몫이었다. 어린 아들을 앞세우고 들길을 걷는 모습이 시간의 다리를 건너 어린 시절로 이끌어 주었다.
한적한 길가의 음식점에서 상대적으로 비싼 맥주와 티베트 토속 음식으로 점심을 간단히 때웠다. 앞문 없는 화장실도 들렀다. 10년 전 중국 여행 때는 북경과 같은 큰 도시에서도 문 없는 화장실이 다반사였는데……. 그 사이 참으로 많이 발전했다. 화장실 문화가 그 나라 전체 문화의 척도라 해도 과언이 아닐 성 싶다. 어린 시절 시골의 짚방석 화장실문이 생각난다.
또 달린다. 비가 연간 거의 없는 곳인데도, 수만 년 동안 내린 비로 수십 미터에서 백 미터가 넘은 높이의 큰 협곡이 생긴 것이 신기하다. 유채꽃밭을 여러 번 지나 험악한 골짜기를 넘으니, 라사시 경계를 지나 日喀則(일객칙, 르카치, Shigatse) 지구로 넘어왔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도의 경계를 넘어온 셈이다. 처음으로 만난 지역이 仁布縣(런뿌시엔, Rinbung)이다. 도로포장이 한창이었다. 대형 광장과 조형물도 현대식이었다. 분명 대변화였다. 순간 뜻밖의 소나기를 만났다. 보기 힘든 광경이다. 마을 옆을 스치는 널따란 도랑에 황톳물이 불어나 여러 대의 랜드 크루저가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얼마간 기다리고 나니 금세 물살은 잦아들고 지프차는 배기가스를 뿜어대기 시작했다. 그래도 순간 아찔했다. 4500cc의 위력이라고 할까? 맑은 하늘이 더욱 맑아 보인다. 눈앞에 펼쳐진 산길은 꾸물꾸물 기어가는 아나콘다 뱀과 흡사한 모양이다. 누드 산길을 누비는 기분은 정복 대장군이 된 기분이다. 고개마다 예외 없이 경번은 바위를 감고 펄럭이고 있었다. 더러 버려놓은 묵은 집들도 사람들은 살지 않지만 담과 마당이 그대로 고색창연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어쩌다 만나는 馬夫와 馬母, 馬童들은 기름을 먹고 달리는 현대판 自動馬에게 신기한 듯 그윽한 눈빛을 보낸다.
마침내 티베트 제2의 도시 日喀則(르카치, Shigatse)에 도착했다. 고색창연한 도시에 어울리지 않게 공원에는 현대판 영웅기념비가 우뚝 서 있다. 어지럽다. 길가에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삼삼오오 모여 맥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구릿빛 얼굴의 시민 모습이 깔려 있다. 이곳에서 제일 큰 사원 白居寺를 찾았지만 늦어서 정상에는 올라가 보지 못했다. 1418년에 세워진 사찰 경내에 조각, 벽화, 경전 등이 많다는데 역시 허사였다. 폐문 시간이라는 것이다. 늦었다면 입장을 시키지 말든지 금세 문을 닫으니 비싼 입장료가 아쉬웠다. 대신에 용심을 내어 1층 안의 불상과, 고탑 예술의 백미인 白居塔을 후다닥 찍고, 대문 잠그는 소리는 뒤로 하고 문을 나섰다.
무척 피곤한 하루. 입맛은 없고, 탈진한 상태에서 병원에 들러 포도당 주사를 한 병 맞고 기운을 찾았다. 계곡마다 그림 같은 마을들, 유채꽃과 보리와 밀이 조화롭게 수놓은 들판, 계곡의 세찬 물줄기 등을 생각하며, 오늘 밤엔 붓을 잡지 않고 일찌감치 잠을 청했다.
2006.08.21
청계천 라이브 서예(8. 19)
8월의 셋째 주말약속대로 청계천 광교 밑에서라이브 서예 행사가 있었다.
그 어느 해보다 길고 무더운 날씨 탓인지다른 때에 비해회원의 참석도 저조했고조용한 행사였다.하지만 9월 30일에는서울문화포럼과 함께하는 행사로시끌벅적하리라 믿는다.돌아오는 길에인사동 백악미술관 들러산하 윤종득 전각전을 감상했다.축하 겸 대구에서 올라온 수중 이종훈 묵객과 더불어삼계탕에 소주를 나눴다.
2006.08.20
제5대 노원구의회 개원행사 참석
노원구의회 개원행사 참석* 일시 : 2006. 8. 18(금) 15:00* 장소 : 노원구청 대강당(2층)
제5대 노원구의회 개원행사 초대를 받았다. 단체장을 초빙하여 개원행사를 갖기는 처음 있는 일로 생각된다.덥지만 양복에 하회탈 목걸이를 걸치고 택시를 타고 구청 2층에 당도했다. 행사장에 입장하며 일일이 22분의 구의회 의원님들과 악수례를 나눴다.새로운 인물들이 대부분인 듯싶다.재선의 이광열 의장의 인사말과이노근 구청장의 축사로 이어졌다.‘노원구를 서울 동북 지역의 중심도시로 가꾸겠다’는 게 주제이다. 간단한 행사를 마치고정기호 미협회장님과 구청 6층의 문화과에 들렀다.이순분 과장님의 따스한 배려와 허철수 계장님의 치밀한 분석 아래10월 14일(토)에 치를 거리문화행사에 관한 심도 있는 임시회의를 가졌다.
이어서 정 회장님과 함께 남배우 선생님의 작업실 재현요(在鉉窯)를 방문했다.민물매운탕으로 오장의 용트림을 잠재우고 흙으로 옥을 빚어내는 또 다른 예술세계를 접하고솟대 도자기의 염원과달 항아리만한 뿌듯함으로 약속된 음악회를 향해 홀로 길을 나섰다. -----------------------------------------------------------* 문의 : (139-703) 서울특별시 노원구 노해길 183(상계6동 701-1)노원구의회사무국(950-4091~5)
2006.08.20
소운갤러리 개관식 - 시흥 고기리
분당 미금역 8번출구에서 20분쯤 서쪽으로 달리면'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고기리 432-1'의 숲속 은소반 옆에갤러리소운이 나타난다.자연의 아름다움 속에 여러 작가 선생님들과 함께한소중한 자리였다. 017-218-7937 최지숙 관장부산 김미정 화백 010-5600-7165
미스코리아 출신의 최지숙 관장님의 초대로8월 17일 목요일 10시 ~ 15시까지뜻 깊고 구미가 당기는 크로키타임 행사가 펼쳐졌다.
10시 - 남여 2인 누드크로키11시 - 고전무용11시 30분 - 다례(차)12시 - 중식13시 30분 - 누드크로키 전시15시 30분 - 대담 및 여흥, 살사 댄스...사회 - 권상호(수원대)드럼 - 신재남(중앙대)--------------------노래로 만난 사람들회장님 친구 장군님이경희 - 당신과 나이득효 사장 - 사랑유명주 - 해우김영수 - 행복이란차철영 - 백만송이 장미정기호 - 구름 나그네신재남 - 디스코 메들리문쾌식 - 송학사엄숨자 - 만남김미애 - 사랑밖에 난 몰라김광석 - 사랑했지만김도일 - 들꽃(조용필)김연주 - 장녹수유희복 -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권상호 - 그대 그리고 나(소리새)댄스 코리아 - 리차드 강p://cafe.daum.net/dancekorea
2006.08.20
강화 심은미술관 방문
아티스트 여름캠프차 강화도 심은미술관에 수원대 미술대학원 문인화과 선봉 홍형표 교수와 함께 들렀다.주인 심은 전정우 관장님은 한양 가고 없고사모님이 계셨다.잘 차려진 다도실에서차를 나누며 환담을 나눴다.폐교를 이상적으로 재활용한 심은미술관의 연역에 대하여자세한 말씀을 들었다.국가나 지방 자치단체의 도움 없이입장료 3천원으로는 턱없이 어렵단다.오히려 매년 비싼 임대료를 내고 있는 실정이니,설상가상이랄까? 아직도 이 땅의 문화마인드로는 자생 능력이 부족한가?서울과 좀 멀리 떨어져 있는 탓일까?http://simeun.org
2006.08.20
제6일 - 7월 20일(목): 아, 하늘 호수 '나무초'(티베트 네팔 기행문)
제6일 - 7월 20일(목): 아, 하늘 호수 나무초(納木錯, 납목착)
오늘은 초복 날이다. 그래도 입맛을 잃었으니 아침은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어쩌면 티베트 여행의 클라이맥스다. 하늘 호수 나무초 호수를 보러가는 것이다. 나무초 호수는 라싸에서 북쪽으로 190km 떨어져 있다. 이틀 전에 600위안에 예약한 택시가 약속대로 이른 7시에 호텔 앞에 왔다. 다시 라싸를 벗어난다. 라싸를 조금 벗어나면 꼭 설악산 울산바위를 닮은 산이 나타난다. 길가의 미루나무는 어린 시절의 고향을 연상케 한다. 아침 햇살 조명을 받은 산세는 그 윤곽을 더욱 뚜렷이 나타내며 젊은 산의 기상을 드러낸다. 산의 원시 숨결과는 달리 도처 널린 전신주는 묘한 풍경의 갈등을 일으킨다.
마침내 흰 모자를 덮어 쓴 눈 덮인 산이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만년설을 머리에 얹은 산이 길게 빙하 자락으로 드리우고,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나타난다. 고도는 점점 높아가며 산소는 희박해 지고, 공기는 차지고 있다. 놀랍게도 새로난 기찻길도 계속 고도를 높여가며 나란히 놓여 있다. 철길과 도로 사이에는 파아란 보리밭과 유채꽃이 채우기도 하고, 누런 강물이 흐르기도 한다. 그러니까 물이 달리는 강을 가운데에 두고, 양쪽 언덕에는 기차와 자동차가 달리고 있는 형국이다. 저기 새 철길이 오롯이 보이는 길가에 큰 간판이 보인다.
构建文明城镇(구건문명성진) 문명화된 도시와 작은 마을을 세워 创建新型牧区(창건신형목구) 새로운 모습의 목축 지역을 창건하자.
마침 소와 양을 합해 놓은 듯한 수십 마리의 검은 야크들이 문명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가로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작은 풀을 뜯고 있다. 등과 옆구리 쪽의 털은 깎아서 배와 엉덩이 부분에만 긴 털이 자라고 있어 우스꽝스러웠다. 한참을 달리다가 화려하게 장식한 말을 타고 가는 대가족을 목격하기도 했다. 저런 수백 마리의 양 떼가 초지를 거쳐 도로를 건너 산으로 오르고 있어요. 눈만 내놓고 머리를 수건으로 두르고, 차가운 밤을 대비하여 두꺼운 점퍼를 허리에 두른 젊은 아낙이 그 많은 양 떼를 몰고 있다. 그물론 그때마다 반드시 차를 멈추고 사진 촬영에 열을 올렸다.
저기 보세요. 마침 강 건너 철길에 이른바 하늘 열차가 달리고 있었다. 머리가 세 개나 되는 열차다. 16량의 객차를 달고 있었다. 매일 밤 한 차례 북경을 출발하여 라사까지 근 48시간 동안 달려 왔다가 이튿날 아침에 다시 북경을 향해 돌아가는 열차, 티베트의 경제 수준을 높여 주는 열차, 티베트 독립을 요원하게 해 주는 열차가 우리와 함께 나란히 달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탄 택시는 깊고 깊은 잿빛 산골짜기를 헉헉 거리며 오르고, 계곡의 물살은 우리 쪽을 향해 세차게 내리 꽂히고 있었다. 갈수록 길은 더욱 굽이치고, 시간이 흐를수록 숨이 턱턱 막혀 온다. 고산증이 더욱 심하게 시시때때로 엄습해 온다. 판피린을 먹고 물을 마셔도 별 소용이 없다. 그런데, 우리보다 먼저 퍼진 것은 다름 아닌 택시였다. 앞뚜껑을 열고 물로 식혀 가며 조심조심 운전해 갔다.
그리고 차도 식힐 겸 경번이 펄럭이는 중간 지점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펄럭이는 경번 주변의 돌무더기 속에서 놀랍게도 티베트 문자가 새겨진 비석 조각들을 여러 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냥 들고 와도 될 것 같았지만 한 친구에게 물어 싼 값에 하나를 사서 차에 실었다. 우리가 떠날 때 쯤 산적처럼 생긴 두목격인 한 사람에게 커다란 비석 조각을 또 들고 와서 흥정으로 요구해 왔지만 사양했다.
다시 삐걱대는 차를 타고 나무초 호수를 향하여 마지막 피치를 올렸다. 엔진이 열을 받았다 싶으면 연신 개울을 물을 퍼부어 식히며 올라갔다.
마침내 매표소가 있는 언덕에 도착했다. 많은 어린이들이 몰려와 사진 모델이 되어 주는 대신에 약간의 돈이나 사탕을 요구했다. 모두들 소매가 긴 두꺼운 옷을 걸치고 있었다. 몇 달 동안 세면을 하지 않은 얼굴에다 새까맣게 탄 피부였다. 아이들과 어울려 기념 촬영을 하고, 한 텐트 안을 방문했다. 가장은 없고 젊은 부인이 아들, 동생과 함께 반갑게 맞아 주었다. 바닥이 그대로 초지인 것을 보니 금세 옮겨온 텐트로 보인다. 좁은 공간에 옷과 이불, 간단한 그릇과 검게 그슬은 솥과 주전자, 마른 짐승의 똥이 살림의 전부였다. 목이 마르고 야크 젖이 문안에 놓여 있었지만 참았다.
목적지를 향하여 다시 차에 올랐다. 마침내 저기 하늘 호수 나무초가 보인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고개의 이름은 나껀산커우(納根山口)이다. 이 고개는 놀랍게도 해발 5160m나 된다. 따라서 라싸에서 며칠 간 고소 적응을 하지 않고는 금방 넘을 수 없는 고갯길이다. 다른 명소와 마찬가지로 높은 고갯마루에도 여지없이 경번이 일대를 뒤덮고 있었다.
산 구비를 돌아들자 드디어 옥빛 나무초가 시야에 들어온다. 수백 마리의 하얀 양 떼가 기막힌 색깔의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설산이 호수를 휘감고 있는 하늘 호수 나무초…….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떠 있는 호수이기에 붙여진 별명이리라. 호수의 한쪽 끝은 수평선끝이 보이지 않는다. 호수 면은 해발 4718m, 호수 최고 깊이는 33m, 동서 길이는 70km요, 넓은 폭은 30km나 된단다. 호수 남쪽으로 가장 높은 설산인 7111m의 녠칭탕굴라봉(念靑唐古拉峰)이 보인다. 호수는 너무나 잔잔하고 깨끗하여 짙은 남색을 띠고 있어 하늘빛과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다. 나무초 호수는 티벳의 3대 신호(神湖)중 하나이며 티베트불교의 성지(聖地)로 유명하다. 나무초는 천호(天湖)를 뜻하며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염수호(鹽水湖)이자 세계에서 고도가 가장 높은 염수호란다.
문제는 우리가 타고 온 차가 여러 차례 문제를 일으키더니 결국 퍼지고 말았다. 호수 관광도 잠시, 돌아갈 걱정이 앞선다. 고도 때문에 머리는 아프고, 갈 길은 태산이다. 여러 가지 방도를 생각한 끝에 기사에게는 미안하지만, 버려두고 만원의 시외버스를 양해를 구하고 돌아왔다. 다행이라는 생각에 나는 짐을 놓은 기사 옆에 앉아서 리코더를 불면서 한국 음악 소개를 했다. 각국 여행객의 박수를 몇 차례 받고 힘을 얻었지만 그것도 잠시, 내 몸도 퍼지고 말았다. 잠을 자려고 해도 등받이가 없으니……. 중간 귀착지에 도착하여 눈을 뜨니 노천 온천이 용솟음치고 있다. 버스가 라싸 시내에 도착한 곳은 우리 호텔과 그리 멀지 않았다. 많은 예비 식량을 뒤로 하고 오늘도 아리랑식당에 들러 삼겹살에 김치찌개와 된장찌개에 한 병에 만 육천 원 정도 하는 소주로 한두 잔으로 피크 데이를 마무리했다.
호텔에 돌아와 직원들에게 그들의 이름을 붓글씨로 써 주었다. 그랬더니 책이나 음료수 등 각자 작은 선물을 해 왔다.
자리에 누워 생각해 본다.
이렇게 숨쉬기조차 힘든 땅에서도 대를 이어 아이 낳고 밝은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비결이 뭘까? 그들의 모습 뒤에는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늘 오버랩 되어 떠오른다.-----------------------------------------------------나무초 입장료 320元(4인)나무초 1일 기사 흥정 500원(나무초에서 퍼짐)돌아오는 길 버스비 300원호텔 방값(2개 2일) -720원호텔 다방(2박 3일) 44원점심 길거리 간식 - 32원(미역국)백거사 입장료 80원* 르카치 강건호첼숙박료 160원식사 45월사원입장료 45월물값 24월점심 53월저녁에* ㅁ형 호텔에서저녁 114원방 100원아침 60원 계 274원물 4개 12원중식 35원* 큰 팁 라나에게 600원/ 기사에게 300원차비 700원, 입국 60불, 네팔기사 팁 20원
2006.08.14
작호 - 嘉山 裵東壽, 慧泉 鄭喜子
嘉山 裵東壽(獨立剛情->開拓開發)裵14획 嘉14 山3裵(옷치렁치렁할 배)자는 긴 옷을 치렁치렁하게 입고 있는 모습, 또는 그렇게 입고 여유롭게 徘徊하는 모습입니다. 상하에 衣자의 모습이 보이지요. 그러므로 아름다운 산, 嘉山에서 산책하는 모습이 멋있겠지요. 嘉는 북치며 노래하는 아름다움입니다. 鼓자의 구형이 위에 보이지요. 嘉자 안에 喜(기쁠 희)자가 숨어 있음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慧泉 鄭喜子(財錄旺盛->有德長壽)鄭15획 慧15泉9鄭(나라이름 정)자는 酋長(추장)이 두 손(大)으로 제사를 받드는 고을(邑)이란 뜻입니다. 慧(슬기로울 혜)자는 손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모습니고, 泉(샘 천)은 그야말로 샘입니다. 인생에서 슬기로운 샘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주변의 갈증을 풀어주고, 온갖 근심과 마음의 때를 씻어주기도 하지요.두 분은 부부로서, 남편의 호는 아내의 성명과 互惠(호혜)가 되고, 아내의 호는 남편의 이름과 互惠(호혜)가 됩니다.
2006.08.12
제5일 - 티벳의 시골마을(티베트 네팔 기행문)
*위: 티베트 시골 마을에는 어디나 땔감용 똥 천지다.*아래: 소조사에서 전경통을 돌리는 라싸 시민.
제5일 - 7월 19일(수)
오늘은 지프차를 하루 빌려 타고, 라싸 시내를 벗어나 변경 마을을 순회하기로 했다. 전지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츄슈(Chushu, 曲水縣) 지방의 한적한 골짜기 마을이다. 물론 도로 포장이 되어 있지 않으므로 자갈길을 어렵게 지나고 더러는 강물을 건너기도 했다. 제주도를 연상케 하는 유채꽃과 키가 작은 보리밭이 강가에 끝없이 펼쳐진다. 손에 잡힐 듯 가까이에 있는 마을이지만 막상 다가가 보면 대단히 멀리 있는 마을이었다. 낯선 사람만 만나면 으레 ‘꽁캄상!’, 헤어질 때에는 ‘슈앗!’ 하고 인사를 나눴다. 여고생으로부터 애들과 헤어질 때는 ‘뚜앗!’ 이라 한다며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라뚜(熱時) 마을과 라라(拉熱) 마을을 들렀다. 역시 중국이라 담은 높았다. 옆집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다. 마을마다 비슷한 모양의 사찰이 있다. 라뚜 마을의 한 가운데에 있는 사찰을 들렀을 때, 비교적 말쑥한 사람들이 있어서 물어보니, 라싸 시내에서 조용한 시골 사찰을 찾아 참배하러 왔다는 것이다. 시골 사찰만은 경내에서 돈 들이지 않고도 사진을 촬영할 수 있었다. 라사에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세속화 되다가보니 모든 게 돈으로 통하지 않나 생각된다. 큰 나팔도 불어보고, 북과 징도 라마승의 양해를 구하고 쳐 보았다.
마을에 들어서자 어른들은 모두 들이나 산에 나가고, 아이들과 몇몇 부녀자들만이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티베트는 나무가 귀한 곳이므로 마을 안은 온통 똥 천지였다. 지붕은 물론 담 위와 광에조차도 말린 소똥, 야크 똥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공동 우물이 있는 곳에 가 보니, 부녀자들과 아이들이 모두 빨래를 하느라 분주했다.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이 메마른 골짜기에 물이 나온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모든 가정의 부엌에는 생각보다 살림살이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어린 양을 안고 젖을 주면서 놀고 있었다. 사탕을 나눠주니 밝은 표정으로 촬영에 기꺼이 응해 주었다.
시골 마을을 빠져 나와 오후 나절에야 曲水縣 강가 그늘을 찾아 준비해 온 버너에 불을 붙이고, 압력솥으로 밥을 해 먹었다. 연일 계속되는 고소증으로 인해, 음식 맛은 여전히 알 수 없고 살기 위해 억지로 먹을 뿐이다. 물통은 안고 살며, 오이와 당근으로 간식을 대신했다.
시내에 돌아와 남는 시간에 라모체(小昭寺)에 들렀다. 사원을 빙빙 돌면서 커다란 전경통을 돌리는 사람들, 손에는 마니차가 쉴 새 없다. 내세가 준비 되어 있는 사람들이라 비록 온몸이 지저분한 중생일지라도 눈빛만은 매우 깊고 소망이 있어 보였다.
연변 출신의 아저씨가 경영하는 ‘아리랑 식당’ 식당에 들러 우리 음식에 흠뻑 젖어 보았다. 삼겹살, 된장찌개 등,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고 충실한 식사를 했다.
2006.08.09
제4일 - 노브링카 원림과 드레풍사원(티베트 네팔 기행문)
*위: 포탈라궁 *아래: 드레풍사원 골목
제4일 - 7월 18일(화)
아침 5시에 일어나 택시를 타고 포탈라궁 매표소에 갔지만, 실제 매표는 오후 5시에 하며, 선착순 900명만 받아들인 단다. 예매에 또 실패하고 말았다. 내일의 입장을 위해 오늘 하루 새벽부터 줄을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 우선 이해가 가지 않는다. 또 이른 아침에 오라고 했으면 순차대로 매표를 하면 되지, 오후 5시에야 매표를 한다는 것도 납득되지 않았다. 아까운 시간을 온종일 매표를 위해 빌붙어 앉아 있다는 것이 말도 되지 않는다 싶어 고민 끝에 포기하기로 했다. 암표상들이 은밀히 다가와 흥정을 요구하지만 엄청난 돈은 물론 여권까지 요구하는 터이어서 불안감만 가중되었다. 그러니까 대신 기다려주는 값을 지불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포탈라궁 입장을 빌미 먹고 살아가는 멀쩡한 인민들이 무척 많겠구나 하는 생각에 모든 것에 수긍이 간다.
“똑같은 사원의 하나겠지 뭐.”
“포탈라궁은 이제부턴 ‘For Dollar 궁’이 되고 말았어.”
쉐청삔관에 돌아와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다음 목적지 달라이라마의 여름별장 노브링카(Norbu Linka, 罗布林卡)를 찾았다. 포탈라궁 서쪽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티베트어로 ‘보배 園林’의 의미로, 18세기에 조성된 조경 풍치림이다. 36만㎡의 넓이로 티베트의 인조 원림 중 최대 규모이다. 흩어진 연못에는 물고기가 뛰어놀고, 꽃길에는 벌, 나비가 쉬어가며 신랑신부 한 쌍이 나타나는 걸 보니, 티베트 안에서 티베트와 가장 다른 공간이라 생각된다. 374칸의 방이 있다는데, 일부만 보고 발길을 돌렸다.
오후에는 중국 최대 규모의 사찰이라는 드레풍사원[Drepung Monastery, 哲蚌寺(저빵스)]을 들렀다. 드레풍은 라사 시내에서 서북쪽에 12km쯤 떨어져 있다. 사원 입구를 택시로 통과하는데는 웃돈 2위안이 필요하다. 사찰 구내마다 '촬영비 20위안(약 2600원)' '촬영하면 돈을 내야 함'이라고 적힌 푯말이 곳곳에 붙어 있다. 드레풍은 ‘쌀더미’라는 의미란다. 쌀이 생산되지 않는 곳의 쌀은 천금과도 같을 것이다. 티베트의 모든 사찰이 벽에 흰 회분칠을 해서 스치면 옷에 묻을 정도이다. 그러니 멀리서 보면 쌀을 쌓아 놓은 듯하다. 5대 달라이 라마가 포탈라궁을 세워 이주하기까지 2, 3, 4대 달라이 라마가 거처하던 곳으로, 한창 때는 만여 명의 승려가 기거했으나 1959년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한 이후, 줄곧 줄어들어 현재는 400명 정도의 승려만이 수도를 하고 있단다.
사찰 밖에는 대낮의 땡볕 아래에서도 여전히 손에는 마니차를 들고 코라를 돌고 도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찰 경내의 골목들은 쪽빛 하늘을 배경으로 하고 새하얀 벽이 강한 햇살을 받아 그림처럼 아름답고 신비롭기까지 하였다. 미로를 헤매듯이 굽이굽이 돌아 한 경내로 들어가니 마당 한 가운데에는 태양열 주전자가 요란하게 끓고 있었다. 몇 분 스님들이 나와 반가이 맞으며 개인 방까지 안내해 주었다. 한 평 정도의 좁은 방안엔 책상과 경전이 거의 모든 것이었다. 우리의 촬영을 돕기 위해 소리 내어 독경까지 해 주었다. 티베트어로 씌어 있으니, 내용은 알 길이 없다. 작은 봉창으로부터 햇살이 화살처럼 책상 위로 내리 꽂혔다.
저녁 때에는 이곳 사람들도 잘 알지 못하는 비구니 사찰 창고사(倉姑寺)에 들렀다. 마침 대부분의 비구니들은 출타 중이었지만, 나는 배낭 속의 문방사우를 꺼내어 창고사 현판을 써서 선사했다. 서예를 알지 못하는 모든 스님들은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내 무릎이 아플까봐 매트를 꺼내 주었다. 처음으로 티베트 글자를 휘호해 보았다. 나의 휘호 율동과 무식한 티베트어 글 솜씨에 웃음을 자아냈다.
2006.08.09
제3일 - 조캉사원과 세라사원(티베트 네팔 기행문)
* 위는 조캉사원 옥상에서의 정경* 아래는 세라사원 경내에서 문답하는 어린 승려들제3일 - 7월 17일(월)
라사에서 처음 맞는 아침은 두통의 연속이었다. 더러는 소화가 되지 않고 열이 나며, 더러는 관절이 아프다고 했다. 기압의 차이로 준비해 온 라면 봉지가 핸드볼처럼 빵빵해져 있었다. 과자 봉지는 물론 먹물통 등 밀폐된 용기는 모두 폭발 직전이었다. 가위질로 구명을 내거나 뚜껑을 열어서 기압조절을 했다.
미음을 끓여 고추장으로 겨우 아침을 때우고, 아침의 조캉사원을 다시 한 번 둘러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淸淨無垢한 하늘에 무심히 흐르는 祥雲을 바라보며 조캉사원 앞 광장을 걸었다. 시의 중심가에 있으며 7C에 세워졌다. 티벳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사원으로 당나라 건축양식에 네팔과 인도의 예술적 특색이 엿보인다. 아울러 조캉사원은 위에서 보면 불교적 만다라식 우주관을 실현했다고 볼 수 있다.
주요 전당의 복도에는 장족의 역사와 신화가 반영된 벽화가 채색되어져 고색창연하고 대전의 한가운데는 唐의 문성공주(文成公主)가 서안에서 가져온 12살의 석가모니 도금 동상이 안치되어 있다. 양측에는 쏭찬깐포(松贊干布)와 문성공주, 네팔의 자존공주(赤尊公主) 등의 조각상이 있다. 티벳왕국의 창건자인 쏭찬깐포(松贊干布)는 시조 닝치찬포(聶墀贊普)로부터 계산해서면 32대 찬포이다. 31대 남리롱찬(囊日論贊)의 아들인 쏭찬깐포는 617년에 찬포에 올라 새로운 형태와 질서를 갖춘 티벳왕국을 세운다. 찬포(贊普)는 티벳어인 찬포(btsan-po)의 음역이다. 그 뜻은 ‘웅강(雄强)한 남자’ 곧 씩씩한 남자의 뜻으로 티벳의 군주를 호칭한다.
그런데, 한편으로 중국 학자들은 예부터 한족(漢族)과 티베트 민족이 "장인과 사위 관계였다"는 봉건적인 주장을 펴고 있다.
"당태종이 문성공주(文成公主)를 토번왕국 임금 쏭찬깐포(松贊干布)에게 시집보낸 뒤, 한족과 티베트 민족은 장인과 사위 관계가 되었다."
이는 분명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문성공주는 가짜공주다. 당태종이 토번왕국의 군사위협에 굴복하면서 급조해 시집보낸 가짜공주인 것이다. 설령 문성공주가 진짜공주라 하더라도 과거 봉건왕조의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오늘날의 현실을 합리화시키려는 이런 식의 접근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고려는 한 때 원나라의 부마국이었다. 그런데 이를 근거로 현재의 대한민국이 몽골 또는 중국의 일부라 주장한다면 너무나 황당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송찬깐포와 결혼한 또 다른 사람이 있다. 브리쿠티라(자존공주)는 네팔공주다. 중국학자 논리대로라면 네팔도 티베트에 대해 역사적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조캉사원 4층 꼭대기를 올라가면 황금빛 지붕을 접하게 되는데 멀리 포탈라궁과 푸른 하늘에 점점이 뜬 조각구름은 신비로움을 더해 준다. 이에 못지않게 조캉사원 앞에서 오체투지를 하는 티베트인의 불심으로 가득 찬 눈빛을 보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반질반질한 돌바닥에 손바닥이 스치는 소리를 내며 엎드리는 티벳들을 보노라면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마침 붉은 가사를 두른 고행중인 텁텐체랑(Thupten Tseraing) 스님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담벼락과 비석 및 마니차 주변 등 여기저기 쓰인 글씨들이 ‘옴마니반메훔’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막간을 이용해 붓을 꺼내어 마니차를 돌리는 할머니를 스케치하기도 했다.
生宗一致. 삶과 종교가 구분되지 않은 삶 그 자체가 종교라 생각된다.
오후에는 세라사원(色拉寺)에 들렀다. 라사시 전체로 보면 북동쪽, 조캉사원에서 보면 정북쪽 끝에 위치한 세라사원은 사원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타운을 형성하고 있었다. 1419년에 창건되었으며, 티벳의 ‘少林寺’로 불리기도 했다. 티벳력 12월 27일에는 세라뻥친절(色拉崩欽節)로서 각지에서 무수한 신도가 운집한단다. 세라사원의 가장 유명한 볼거리는 불경토론인데, 오후 3시부터 한 시간 동안 넓은 마당에서 펼쳐진다. 조용하던 경내가 떠나갈 듯, 시끌벅적한데, 그 이유는 1:1로 물음에 답하는 동작이 무협적이기 때문이다. 큰 소리로 대답하며, 발을 구르고 손뼉을 치며 한 손을 내뻗는 동작의 연속인데 무슨 내용을 말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사뭇 진지함을 잃지 않고 있다.
내일 그 유명한 티벳의 얼굴, 포탈라궁을 구경하기 위해 예매하러 갔으나, 멍청히 1시간 가량 줄만 서 있다가 잘렸다. 내일 새벽 5시에나 와서 줄을 서야 예매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내일로 미루고 포탈라궁 앞 언덕이 오르기도 하고, 광장을 걷기도하며, 마니차와 종을 사는 대신에 아줌마를 모델로 사진 촬영에 열중했다. 카메라만 둘러대면, 아이들은 ‘스위트(사탕)’ 타령, 어른들은 돈 타령이다. 그 옛날, 머리카락 속의 서캐처럼 聖스런 공간 속에 俗物들이 왜 그리도 많은지......
뽀개지는 아픔을 잊기 위해, 저녁에는 호텔 로비에 나와 붓글씨를 쓰곤 했다. 書魔를 통하여 고소증의 아픔을 잊기 위해서다.------------------------------------------ 퍼온 글(참조) ---여기에서 티벳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 세계의 지붕 티벳.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거대한 만년설. 끝없이 펼쳐지는 꼬불꼬불한 산 길. 칠흑 같은 밤의 정적. 티벳은 이곳을 찾는 모든 여행객들을 그 ‘원시의 순결’로 주눅들게 한다.
그러나 이 대자연 속에는 질곡으로 가득한 파란만장한 티벳의 역사가 있다. 티벳이 중국의 일부냐 독립국가냐 하는 해묵은 역사논쟁의 시발점은 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중국은 당나라였고 티벳은 토번제국이었다.
당의 태종이 문성공주를 토번임금(松贊干布)에게 시집보낸다. 이를 두고 티벳은 ‘화해’로 해석하고 중국은 토번이 당의 선진문물을 배우기 위해 장인-사위 관계를 자청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토번 왕국 붕괴 후 400여 년간 분열을 거듭한 티벳은 원(元)대에 이르러 불교지 도자가 몽골을 대신해 통치하는 정교합일의 독특한 정치체제를 유지하다가 18세기에 다시 청의 지배하에 놓인다.
그 후 불어닥친 제국주의의 광풍. 영국과 중국이 주도권을 다투면서 티벳에서는 독립운동이 본격화됐다. 독립운동의 불길은 1940년대 다시 살아났으나 이를 빌미로 중국은 티벳을 손아귀에 넣게 된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미국과 UN의 관심이 한반도에 쏠려 있는 사이 중국군은 티벳을 침공했다. 중국은 티벳의 동쪽 경계였던 금사강(金沙江)을 건너 창도(昌都)를 점령했다. 티벳은 UN에 대표단을 보내 지원을 호소했다. 그러나 UN과 미국은 한국전쟁 때문에 여력이 없었다. 더욱이 한반도는 공산주의를 억 제하는 교두보라는 인식이 있었으나 티벳은 전략적 가치가 크지 않다고 판단했다. 결국 티벳은 중국의 행정구역으로 편입됐다. 승자의 기록에 묻혀버린 것이다.
■후진타오, 티벳 독립운동 진압 후 인정받아■
티벳에도 3·1운동 같은 게 있었다. 중국 강점 10년째인 1959년 3월 대규모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중국은 무자비하게 티벳을 탄압했다. 일부 인사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티벳 전체인구의 6분의 1인 126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1980년대 들어 중국에 개혁·개방의 물결이 불어닥치면서 티벳에는 다시 한 번 소용돌이가 친다. 이번에는 미국이 티벳의 전략적 가치를 간파했다. 티벳은 미국에게 있어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좋은 재료였다. ‘티벳 카드’를 중국 압박의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달라이 라마가 그 중심에 있다.
티벳의 심장에 해당하는 도시가 라싸(拉薩)다. 이 라싸에서 칭하이(靑海)성의 거얼무(格彌木)를 잇는 장장 1142㎞의 칭장(靑藏)철도 2단계 구간이 최근 모두 완공됐다. 지난 2001년 6월에 착공돼 4년여동안 우리나라 돈으로 약 3조1200억 원의 건설비가 투입된 칭장철도 2단계 구간은 티벳의 중심인 서장자치구를 관통하는 서부대개발사업의 핵심 프로젝트였다.
서부대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중국이 이렇게 험한 지역에 고원철도를 깐 이유를 알만하다.
바로 티벳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자는 것이다. 국제적 논란을 불식시키고 티벳은 확실한 중국땅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선포하겠다는 것이 바로 중국의 속셈이다.
특히 후진타오 주석의 ‘티벳 야심’은 남다른 데가 있다. 후진타오는 지방 관료로 정치계에 입문한 인물이다. 그가 중앙권력으로, 그것 도 핵심으로 부각될 수 있었던 계기가 다름 아닌 티벳이었다. 후진타오가 티벳 자치정부 총서기로 재임했을 때 티벳에서는 독립운동이 일어 났다. 당시 후진타오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력으로 진압했다. 티벳족 간부와 공무원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문화대혁명을 방불케 하는 처사였다. 이 일로 후진타오는 덩샤오핑, 장쩌민 등 고위층에게 능력을 인정받게 됐으 며 결국 덩샤오핑에 의해 장쩌민의 후계자로 낙점된 것이다.
“영리하지만 과단성이 없다”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던 후진타오는 티벳 사태 이후 덩샤오핑으로부터 “원칙문제에 있어 입장이 분명한 절대 연약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티벳은 후진타오의 은인이다.
2006.08.07
제2일 -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게 절하는 사람들(티베트 네팔 기행문)
* 위: 청뚜발 라사행 기내에서 찍은 히말라야 산맥의 장관* 아래: 조캉 사원 앞에서 오체투지하는 신도들 제2일 - 7월 16일(일)
아침에 일어나 청뚜에 계시는 서예가 陳선생을 비롯한 몇 분께 안부 전화를 통하여, 일정 탓으로 함께하지 회동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다. 호텔에서 간단히 조식을 하고, 커피 한잔에 오얏 몇 개로 후식을 한 뒤, 라사[Lhasa, 拉萨]로 가기 위해 청뚜공항으로 나갔다. 온갖 과일들이 형형색색으로 우리를 유혹하고 있었다. 잘 생긴 복숭아로 시각과 미각을 달랬다. 기다리는 동안 한국을 다녀오는 중이라는 티벳 승려를 만나 대화를 나눴다. 시가체(Shigatse, 日喀則)에 계시는 아난(A.nan, 阿南)이라는 분으로 한국에 대하여 너무나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중국 西南航空 비행기가 라사를 향하여 힘차게 이륙하자 험준한 산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처음엔 그나마 산자락에 초록빛 치맛자락이 펄럭이더니, 금새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는 척박한 민둥산 산봉우리로 바뀌었다. 그것도 잠시일 뿐, 만년설로 뒤덮힌 장엄한 산들이 눈앞에 펼쳐질 때는 탄성을 지르기 않을 수 없다. 계곡마다 빙하가 물고기 비늘처럼 길다랗게 흐느적거리듯 늘어져 있다. 아, 진정한 雪國이로구나! 스튜어디스에게 양해를 구하고 앞으로 나가,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거무스름한 산을 선회하던 비행기가 강변을 따라 하강하고 사람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서둘러 모자와 선글라스를 챙긴다. 드디어 티벳 라사이다. 수화물을 찾아 공항 대합실을 나서는 순간, 사방이 온통 잿빛이다. 짙은 갈색의 피부를 가진, 꽝 마른 픽업 가이드와 제법 뚱뚱한 기사가 봉고를 가지고 라사공항에 나와 있었다. 마중 나온 가이드는 환영과 무병장수의 뜻을 지닌 하얀 비단 천, 까닥(哈達)을 목에 걸고 주었다. 기념 사진을 찍고 분주히 라사(拉薩)로 향한다. 원초적 빛깔을 그대로 간직한 하늘의 푸르름에 눈을 돌리다가도 화사하고 깨끗한 햇살에 찔려 실눈을 뜨고 간다.
가끔 길가에는 순수한 대자연에 잘 길들여진 인간이 보인다. 길들여진 인간의 순수함은 가끔 강인함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달리는 차 속에서 보기에 더욱 가까이 다가오는 정적인 황량한 산자락과 바로 옆에서 유유히 동적으로 흘러가는 라사 강을 바라보노라면 ‘靜中動’의 묘한 이치가 느껴진다. 벼랑에 새겨진 마애불상의 황금빛은 따가운 햇살을 받아 우주 밖으로까지 비칠 듯하다. 불상의 얼굴 모습은 우리 불상이라고 착각할 만큼 닮아 있다.
모든 것이 새로운 풍광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쪽빛 하늘과 하얀 구름의 조화, 칼날진 능선을 자랑하는 젊은 산들, 7월의 평균 강수량이 130밀리 밖에 되지 않음에도 웬 강물은 저리도 흥건히 흐른단 말인가. 먼 산도 공기 중에 물방울과 먼지가 없기 때문인지 손에 잡힐 듯하다.
어느덧 우리 차는 새로 생긴 깔라산터널[嘎拉山隧道(알랍산수도)]을 통과한다. 이 터널의 준공으로 사라 시내로 쉽게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단다. 주로 물길 따라 길이 나 있고, 길가에 자라는 나무라곤 미루나무와 버드나무 두 종류밖에 보이지 않았다. 드넓은 하천 부지에 미루나무로 인공조림한 모습이 인상 깊었다. 흥에 겨운 나머지 나는 차 맨 앞자리에 앉아 리코더로 우리 민요를 연신 불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머리가 무겁고 띵하며, 목이 뻣뻣해 왔다. 이게 바로 염려하던 고산증이로구나. 왠지 배낭도 올 때보다 훨씬 가벼워졌다 했더니만.
드디어 마차와 자동차가 빈번해 지더니 라사 시내로 접어들었다. 라사는 해발 3650m의 고원에 위치한다. 라사는 티벳어로 ‘신의 땅’이란 의미이다. 티벳이 현재도 중국 전체의 8분의 1에 해당하는 넓이이지만, 원래는 중국의 4분의 1이나 차지하는 대단히 드넓은 고원이었다. 티벳, 신짱, 칭하이, 쓰촨, 윈하이에 조금씩 떼주고 난 뒤에 현재의 땅이 남았다. 소수민족 중에 장족(藏族)이 4천만 정도로서 단연 으뜸이다.
설성빈관(雪城賓館, Snow Land Hotel)에 짐을 풀고, 걸어서 10분 정도의 가까운 절 조캉사원(Jokhang, 大昭寺)을 들었다. 사원 앞의 비석에는 ‘포탈라궁’과 ‘조캉사원’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는 내용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었다. 티벳어로 '부처의 집'이란 뜻을 지닌 조캉사원은 티벳에서 가장 오래된 절로 참배객 또한 가장 많다. 이른바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하고, 경전통인 마니차를 돌리는 인파들이 빼곡했다. 문맹자들을 위하여 안에다가 경전을 써놓고, 시계 방향으로 한번 돌리면 안의 경전을 한번 읽은 것과 같단다. 두 다리를 묶고 몸 앞에는 낡은 메트를 깔고, 손바닥에는 짐승 가죽 조각을 장갑처럼 걸치고, 진지한 표정으로 끊임없이 오체투지를 하는 모습을 보니, 신앙의 힘이 없었던들 어찌 이토록 척박한 땅에 사람이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성지 순례의 마지막 여정이 조캉 사원을 맴도는 일이란다. 저 순례자들의 행렬. 생에서의 업(業)을 정화하는 방법으로 사원을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돌면 이생의 업을 소멸시킬 수 있고, 세 번을 돌면 해탈을 할 수 있다는 '코라'는 끝없이 이어지고. 오체투지를 하는 이들의 옷은 마치 그 순례의 깊이를 증명이라도 하는 듯 남루하기 짝이 없지만 그들의 신심과 결부시켜 생각해 해 보면 그 어떠한 것보다도 아름다워 보인다.
1층은 글을 모르는 불자들을 위해 경을 새겨 손으로 돌릴 수 있도록 만든 마니차(法輪:prayer wheel)로 빼곡하다. 그 마니차를 돌리며 '옴마니반메홈'을 외는 이들의 소리는 낯선 여행자에겐 깊은 미로 속에서 들려오는 메아리처럼 들린다.
2006.08.06